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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

Sunny

4 year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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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Books ・ 2021

Avg 3.8

Jan 02, 2022.

그런 책이 있다. 책장을 덮고 나서 오래도록 마음이 몽글몽글한 책. 책을 읽기 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도록 하는 책. 이 책이 그렇다. - 눈 내린 새벽에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세상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 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벗겨 낸 세상의 비밀을 한 겹씩 먹으면, 어떤 비밀은 소화되고 흡수되어 양분이 되고, 어떤 비밀은 몸 구석구석에 염증을 만든다. 비밀의 한 꺼풀을 먹지 않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의 시스템은 그걸 먹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도록 설정되었다. 그러니 언젠가는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시기가 너무 이르면 소화하지 못해 탈이 나거나 목이 막혀 죽기도 하고, 너무 늦으면 비밀을 흡수하지 못하고 그대로 배출시켜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텅 빈 몸이 된다. 지모가 한 말이었다. 태어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사는 것에 미련이 없던 미래는 그때부터 한 꺼풀씩 세상의 비밀을 벗겨 먹으며 묵묵히 기다렸다. 그러다 주워 삼킨 세상의 비밀 중 어마어마한 것이 있다면 꼭 서로 털어놓자고 약속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현재도 약속에 동참했다. 믿기지 않을 진실이라도 일단은 서로 믿어 주기로." "나인은 누워서 곰곰이 자신이 정말 태권도를 계속해도 되는지를 고민했다. 그러다 며칠 뒤 관장에게 태권도를 직업으로 삼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관장은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며 그 이유를 물었다. 나인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져도 눈물이 안 나요. 사람들은 그걸 간절하지가 않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나인과 대결했던 어떤 선수들은 지면 나인이 억지로 메달을 빼앗은 것처럼, 그렇게 무언가를 뺏긴 것처럼 투구 사이로 흐른 땀만큼이나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는데 나인은 어째서인지 눈물이 나지 않았고, 그러다 언젠가 그 간절한 눈물에 지고 말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그냥 딱 보면 알아. 아, 쟤도 바깥에서 왔구나. 신호등이 깜빡일 때 걷지 않는 사람들 있잖아. 버스를 탈 때 노인이나 아이를 위해 한발 양보하거나 지하철에서 사람이 다 내려야만 타는 사람. 이상하리만치 느긋하게 질서를 지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외계인이야. 왜? 인간들이 정해 둔 규칙을 지키는 거지. 외부인이니까." "나인은 ‘피어났다’는 말을 곱씹다, 그것이 ‘태어났다’와 같은 뜻임을 깨달았다." "근방은 차 없이 지나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고마움을 지나치지 못하는 것이다. 나인이 지내는 다세대 주택 집주인 부부도 그랬다. 거실 형광등을 갈아 주거나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어 주면 고맙다는 말을 수차례 하고도 부족하다 느꼈는지 다음 날 삶은 고구마나 옥수수 같은 걸 한 바구니 주고 갔다. 지모는 노인들의 커뮤니티라고 했다. 메시지를 주고받듯이 신세를 갚는 것이다." "찰나의 표정이란 감정을 가장 진솔하게 비추는 호수의 수면 같은 것이다. 조그만 충격에도 금방 흩어지고 만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한때, 잠시 생겼다 사라지는 마법 같은 것이다. 그러니 원망할 수가 없다. 미워할 수도 없고. 어쩌겠는가. 안쓰럽다는 걸, 불쌍하다는 걸, 가엾다는 걸, 애잔하다는 걸. 때때로 어떤 이들의 표정은 파도같이 잔잔하게 밀려오다 부서지고 흩어진다." "지모는 대응하기보다 묵묵히 싸워 가는 쪽을 택했다. 모두가 동의해야 하는 안건에 굽히지 않고 표를 던져 매해 안건이 다시 올라오게 만드는 식으로. 그렇게 해야 결국 이긴다. 소수가 다수를 이기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겹고,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 나게 구는 것이라고. 그게 지모가 살아오며 깨달은 중요한 이치 중 하나였다." "지모는 나인에게 가장 못 견디겠는 것 하나만 지키며 살라고 했다. 물론 조건은 있다. 나인이 위험해지지 않는 한에서." "어떻게 그것만 멸종일 수 있니? 저 선배는 세상에 딱 저 선배 하난데 사라졌잖아. 저기 있다는 거 내가 알았는데 나야말로 그걸 어떻게 모르는 척해. 사람 한 명이 지구에서 멸종했는데.” "이사 온 지 딱 일주일이 되던 날, 늦은 시각까지 가구 공장에서 일하다가 자정에 가까워 도착한 부부는 대문을 열자마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버석하게 마른 풀만 가득했던 화단에 이름 모를 식물이 심겨 있었기 때문이다. 말을 잇지 못하던 집주인 부부는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아름답게 꾸며진 화단을 보자 웃음이 날 만큼 행복해졌기 때문이다. 다음 날 부부는 함께 2층을 찾아 반찬을 나누어 주며 화단을 언제 저렇게 꾸몄느냐고 묻고, 식물의 이름을 묻고, 키우는 법을 물었다. 그 뒤 아무리 일이 고되어도 집에 오면 꼭 화단에 있는 식물을 손질했다. 잠자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부부의 낯빛에는 생기가 돌았다. 책임져야 할 게 생겨서 그런 거라고, 지모가 언젠가 말해 주었다." "나인은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세상 바깥에라도 그 이름을 붙여 두고 싶은 것이라고. 파도에 휩쓸릴지라도 모래에 이름을 적어 두는 것이라고." "이 세계가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은 괴로운 거 같아. 누군가가 내 세상을 떠나면 그 사람이 찢고 나간 틈으로 또 다른 세상이 보여." "목적지가 있는 걸음은 분명하고 힘찼다." "권도현은 아이들에게 그런 친구였다. 권도현의 돈에 관심이 없는 친구는 박원우가 유일했다." "미래도 이제 안다. 두 사람의 이별에는 누구의 잘못도 없었다는 걸. 그저 일방적인 미련만 남았을 뿐이라는 걸." "나인도 한때 자신이 밤에는 세상을 구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지난 새벽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영웅이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리라는 걸 깨달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모두가 천천히, 자연스럽게, 은밀하게, 자신은 영웅이 아니라는 걸,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다는 걸, 아주 평범하거나 혹은 평범하기 위해 아등바등 헤엄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듯이." "무엇을 위해, 누군가를 위해 운다는 건 그만큼 마음의 큰 부분을 내어 주었다는 뜻과 같다." "그런 마음은 가지고 태어나는 건가 봐요.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없는 것 같아요. 가끔 생명을 죽이는 일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나인도 그런 애 같아요. 사람을 살리는 일에 이유를 두지 않는. 요즘 그 애는 그런 일을 하고 있어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함께 구하려고." "인간들은 거대한 슬픔 앞에 언제나 한발 물러났다. 물어야 할 말도, 해 줘야 할 위로도 삼키면서. 어쩌면 남자는 누군가가 먼저 말해 주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누군가가 물어봤더라면 말을 했을 것이고 말을 했다면 그 말이 한으로, 그렇게 노래로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네가 하는 말 다 믿어. 무슨 말이든 그냥 무조건 믿을게. 말하기만 해 줘.” “그렇게 땅에 심었던 것들은 꽃을 피우기도 전에 죽었어. 당연한 결과여서 별 감흥이 없었어. 딱 하나 남은 저 애도 곧 죽겠거니, 그래도 의리가 있으니 쟤가 죽으면 여기를 떠나야지 하고 기다렸어. 그런데 죽지 않고 버티더니, 그 악조건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라더니, 그 무관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피우더라고. 그래서 네 이름이 나인이야. 내게서 난 싹 아홉 개 중 가장 마지막에 핀 아홉 번째. 제일 강했어, 네가. 나는 엄마가 되는 게 두려워서 이모가 되었고, 언제나 거리를 두고 너와 함께 공간을 나눴어. 나는 여전히 내가 엄마라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 알아. 네가 미래와 현재를 사랑하듯, 그리고 그 아이들이 너를 사랑하듯 나도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그러니 오래 이곳에 있어. 네가 만난 이 세상을 다 누리고, 세상이 변하는 걸 목격하고, 기쁨과 슬픔을 전부 겪고 나서 이 세상에 미련이 없어질 때. 그때 시들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다시 피어나 만났으면 좋겠어, 다음에도.” "네가 정말 네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너는 네 아버지가 만든 결계를 언제든 깰 수 있는 아이가 되었어야 해. 그러면 아버지가 만든 결계를 하나씩 깨며 세상 밖으로 나아갔겠지. 너는 아버지가 무서웠던 거야.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는 더 크게 자랄 수 없거든." "생각보다 반응이 더 선량하네. 다행이다. 끔찍한 걸 끔찍하다고 느껴서." "점이 지대는 죗값을 무를 수 있는 유효기간 같은거야. 자신이 저지른 일이 죄인 걸 깨닫고, 그 죄를 평생토록 어깨에 짊어지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거지. 매 순간 후회하고, 매 순간 죄스럽고, 매 순간 시간을 돌리고 싶어 하며, 매 순간 스스로를 괴물처럼 여기면서. 점이 지대를 넘어가면 고통스럽지 않아. 평온해지고 행복해지지. 그리고 언젠가 같은 짓을 반복하겠지. 고통스럽지 않으니까. 바로 앞에 있는 걸 보지 못하고 탁해진 눈동자로 저 멀리 손에 닿지 않는 것만 바라보겠지. 자신이 밟고 있는 붉은 땅이 피로 물든 줄도 모르면서. 권도현은 그 경계에 있었다. 청과 적이 뒤섞인 세계에." "현재는 연락 자주 할 거라고 말했지만 나인은 무섭다.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서로 다른 기억이 쌓여서 다시 만났을 때 도저히 넘나들 수 없을 높은 장벽이 생긴다면. 그것을 부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어른이 됐다는 이유로 서로의 다름으로 인정하고는 그렇게 벽 너머에 있게 된다면. 하지만 그건 함께 있어도 생기는 자연스러운 장벽이라는 걸 나인은 아직 몰랐고, 장벽이 있다 하더라도 함께 같은 길을 가는 것은 변함없다는 것 역시 몰랐으므로 이 모든 고민은 한때 머물다 또 쓸려 갈 거였다." "이 꽃이 처음 싹을 틔웠을 때는 이 세상이 지구였는지도 몰랐을 거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채 일단 있는 힘껏 세상 밖으로 나와 봤겠지. 물을 머금지 못하는 흙과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시선과 앞으로 겪어야 할 많은 시련이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다른 씨앗들처럼 일찍이 삶을 포기했을 텐데, 땅에 있을 때부터 나인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밖에 하지 못해 기어코 세상에 나왔다. 그렇지만 나인은 후회하지 않는다. 이 행성이 자신의 행성이 아니라는 걸 알아도 외롭지 않다. 후회한다고 해서 다시 땅속으로 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타인을 이해하지 못할 때,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 우리가 종족이 다른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서 나는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는 누군가를 보면 외계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신호등 초록불이 삼 초 정도 남았는데 뛰지 않고 걸음을 멈추는 사람을 볼 때도, 길가에 핀 꽃을 찍기 위해 기꺼이 땅에 누워 버리는 사람을 볼 때도, 아이와 강아지에게 친절한 사람을 볼 때도. 너무도 당연했던 선의를 잃은 인간들 속에서 그 원초적인 힘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