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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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어떻게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가? | 푸코는 법적o제도적 모델뿐만 아니라 보편적 범주(법, 국가, 주권 등)에 근거한 전통적 권력 분석을 버리려고 끊임없이 애썼다. 최근 몇 년 동안 내게 엄청난 가르침을 준 학자는 바로 푸코였다. (조르조 아감벤 | 이탈리아 철학자) 오늘날 사람들은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말한다. 그러나 종말을 맞이했다는 이 신자유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이었나)? 신자유주의란 18~19세기 자유주의 경제의 낡은 형태가 부활한 것일까? 아니면 엄격한 상업적 관계가 사회 전역을 뒤덮은 체제? 아니면 국가의 일반화된 행정적 간섭을 은폐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 더 나아가, 정말 신자유주의는 종말을 맞이했을까?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8~79년』에서 미셸 푸코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통상적인 비판을 비판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통상적인 비판은 신자유주의를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거나, 혹은 늘 같은 것이 더 악화된 것(기껏해야 재활성화된 애덤 스미스, 자본 이 고발한 상업사회 자체, 국가권력의 일반화 혹은 지구적 규모의 솔제니친)에 불과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요컨대 '스미스-맑스-솔제니친,' 혹은 '자유방임-상업 및 스펙터클의 사회-집단수용소의 세계와 굴락' 등 신자유주의 문제를 다룰 때 흔히 사용되는 비판의 이 3대 모형은 신자유주의를 그 특수성 안에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푸코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의 특수성은 그것이 통치성, 즉 국가행정을 통해 인간 행위를 이끌어가는 합리성의 일종이라는 데 있다. 요컨대 인구로서 구성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총체에 고유한 현상들, 즉 건강, 위생, 출생률, 수명, 인종 등의 현상들을 통해 통치실천에 제기되어온 문제들을 합리화하고자 시도한 가장 최근의 방식, 간단히 말해서 가장 최근에 시도된 '생명관리정치'의 일종이 바로 신자유주의라는 것이다.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은 이처럼 신자유주의를 통치성의 관점에서 분석함으로써 오늘날 너무 쉽게 너무 자주 운위되는 '신자유주의의 종말'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지극히 '동시대적'인 텍스트이다. 신자유주의가 살아 있는 생명인 인간을 특정한 형태로 생산해내는 통치성의 일종인 한, 우리는 단순히 경제를 민주화한다거나 사회안전망을 재구성한다거나 정권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은 신자유주의 특유의 통치합리성을 이해하고 극복해야만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을 읽어야 할 이유이다. | 통치성의 개념을 통해 파헤친 신자유주의의 본성과 원리 | 나는 자유주의 속에서 통치실천에 대한 비판적 고찰의 형식을 보려했다. 이것은 '통치이성,' 다시 말하면 국가행정을 통해 인간의 행위를 이끌어가기 위한 절차 내에서 활용되는 합리성의 유형에 대한 분석 계획인 것이다. (미셸 푸코) 1977~78년의 강의 『안전, 영토, 인구』가 17~18세기 초에 등장한 새로운 통치합리성(특히 국가이성)을 분석했다면,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은 18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이 통치합리성의 위기를 분석한다. '자유주의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이 통치합리성의 위기를 계보학적으로 추적하는 푸코는 그 위기의 귀결로 20세기에 들어와 이른바 '신자유주의 통치술'이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푸코가 말하는 자유주의의 위기란 한편으로는 자유의 위기, 더 정확히 말하면 자유를 누리는 데 드는 비용의 증가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의 역설, 즉 자유를 보장하려는 메커니즘이 거꾸로 자유를 제약하는 강제로 변해버린 상황('과도한 통치')이 발생한다. 신자유주의 통치술은 바로 이런 위기와 역설에 대한 대처로 등장한 것인 바, 푸코는 1930년대 중반~1950년대의 독일 질서자유주의와 1950년대 말~1970년대 초 미국 시카고 학파의 무정부적 자유주의를 통해 이 새로운 통치술의 성격을 분석한다.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자들에게 자유주의의 위기는 시장에 의한 가격의 조정(합리적 경제의 유일한 기초)이 그 자체로 매우 취약한 데 그 원인이 있었다. 따라서 질서자유주의자들은 경제절차의 자유가 사회적 왜곡을 발생시키지 않도록 보증하는 제도적o사법적 틀과 일련의 사회정책을 통해 경제 영역에서 순수한 경쟁의 논리를 새롭게 '질서'지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미국의 시카고 학파에게 자유주의의 위기는 뉴딜정책, 전후 민주당 정부가 시행한 각종 경제o사회 프로그램 등에 따른 국가행정의 과잉과 경제의 왜곡으로 경험됐다. 따라서 시카고 학파는 가족, 출생률, 비행, 형벌정책 등 그때까지 경제와 관계없는 것으로 여겨지던 영역으로까지 시장의 합리성을 확장함으로써 시장합리성의 도식과 기준을 공고하게 만들려고 했다(인적자본론). 이처럼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와 미국 시카고 학파의 이론은 사뭇 상반되어 보인다. 그러나 푸코에 따르면 독일의 질서자유주의나 미국의 무정무적 자유주의나 모두 사회적인 것을 경제적인 것으로 대체하고 사회 전역에 경쟁 논리를 침투시킴으로써, 시장 원리를 자기통제 원리로 삼는 '자기 자신의 기업가'라는 주체 모델로 규율적 주체를 대체해버린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요컨대 독일의 신자유주의나 미국의 신자유주의나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재발명이었다.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에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교환하는 인간, 즉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동과 행동방식을 유용성의 차원에서 스스로 분석하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더 이상의 교환하는 인간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자기 자신에게는 자기 자신의 자본,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 자신의 생산자,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 소득의 원천이다. 푸코는 근대 생명관리권력의 통치기술을 '살게 하거나 죽게 내버려두기'라 요약한 바 있다. 따라서 시장화된 자기통치 기술에 적응할 수 있는 자,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만을 사회 안에서 '살게 하고,' 이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저항하는 자는 가차없이 사회 바깥에서 '죽게 내버려'두는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근대 생명관리권력의 괴물적 변종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푸코가 통치성에 대한 계보학적 성찰을 통해 시도한 것은 통치성 자체보다는 주체의 문제였다. 즉 "신자유주의가 종말했느냐?"가 아니라 "우리는 더 이상 신자유주의적 주체이길 그쳤는가?"라고 묻기, 바로 이것이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정확한 물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