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는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가!!
데리다, 바디우, 리쾨르, 버틀러 등 다양한 사유들과의 관계 속에서 레비나스 윤리학의 장소와 맥락을 묻는다!
이 책은 ‘타자와 윤리의 철학자’ 레비나스의 사유를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시대와 장소에 맞는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담긴 레비나스 연구자들의 글들을 모았다. 레비나스 연구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강영안 교수의 강연록을 시작으로 데리다, 바디우, 리쾨르, 버틀러 등과의 비교검토를 통해 레비나스 사유의 의의와 한계를 드러내는 글들, 그리고 ‘타자’와 ‘윤리’, ‘종말론’, ‘반전체성’ 등 레비나스의 핵심적 개념들을 파고들어 레비나스 사유의 핵심을 파헤치고 있는 이 책의 글들은 ‘레비나스라는 맥락’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왜 레비나스인가?
이 책의 첫 번째 글인 「나의 철학 여정과 레비나스」는 레비나스를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한 강영안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의 강연록이다(2012년 9월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이 글에서 강영안 교수는 자신의 삶과 학문의 여정에서 레비나스 철학과 만나 경험을 풀어내고 있다. ‘하나님에 관해 철학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레비나스 철학과의 만남은 자신이 관심을 가졌던 ‘종교 인식론’, ‘일상에 관한 철학적 반성’ 작업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레비나스의 사유를 통해 일상의 현상을 들여다보고 생각하는 법을 배웠음을 고백하고 있다. 특히 “타자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히려 나를 세우는” 데 주력했던 우리 사회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 타자의 고통에 관한 관심”을 기울이는 삶의 방식을 말하는 레비나스의 철학은 큰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또한 강조하고 있다.
강영안 교수가 자신의 삶과 학문과의 관련 속에서 레비나스의 철학의 의의를 말해주고 있다면, 문성원은 두 편의 글을 통해 레비나스의 사유에 본격적으로 육박해 들어가고 있다. 이 책 1부의 제목이기도 한 「왜 레비나스인가?」라는 글을 통해 문성원은 “반(反)전체론의 조류 속에서 상대주의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나름의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레비나스 철학의 강점을 찾고 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존재론은 동일자의 평면을 벗어날 수 없고 따라서 전체화와 상대주의의 가능성을 함께 지니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타자와 관계하는 영역인 ‘윤리’를 통해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윤리는 세계를 포착하여 자기화”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호소에 응답하고 책임을 지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다. 이렇듯 동일성 외부에서 오는 타자, 헐벗은 얼굴로서 현현하는 타자에 대한 레비나스의 사유는 “우리를 사유의 경계 너머로 이끌며 그것과 대면하게”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글인 「윤리와 종말론」에서 문성원은 레비나스 철학이 세계와 역사에 대해 갖는 의미를 ‘종말론’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살펴보고 있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종말론은 “전쟁의 현실을 진정으로 극복한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전체성 너머에서 또는 역사 너머에서 존재와 관계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종말론적 평화는 이 세계와 단절된 지평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전체성의 바깥이 전체성을 깨뜨리고” 우리에게 윤리적 삶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세계와 역사, 평화에 대한 철학은 종종 이스라엘이라는 “현실의 문턱”에 걸려 넘어지곤 한다. 문성원은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레비나스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레비나스와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레비나스를 넘어서는 사유가 시작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레비나스와 사유의 성좌들
이 책의 2부는 레비나스 철학을 둘러싼 맥락들을 살피겠다는 본래의 취지대로, 데리다, 바디우, 리쾨르 곁에 레비나스의 사유를 놓음으로써 그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 주고 있다. 첫 번째 글인 손영창의 「레비나스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적 독해」는 레비나스와 가장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던 데리다의 레비나스 독해를 통해 레비나스의 환대와 타자성 개념을 고찰하고 있다. 비교적 일찍 레비나스 철학의 잠재성을 발견했고, 장례식에서의 조사를 통해 존경과 우정을 표하기도 했던(아듀 레비나스) 데리다는 「폭력과 형이상학」을 통해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고 있다. 필자인 손영창은 이러한 데리다의 비판에 대해서 “절대적 타자의 타자성을 적극적으로 논하기보다 레비나스의 타자 담론이 갖는 구조적 특징과 그 한계를 보여주는 데 그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환대’ 개념에 천착하면서 데리다는 초기의 비판적 입장에서 레비나스의 사유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으로 선회하게 된다.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환대 개념을 수용하여 ‘환대’를 “윤리학의 원리 자체”로 격상시킨다. 즉 “타자 없는 윤리학은 성립할 수 없으며”, “타자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환대’라는 것이다. 필자는 새로운 철학 언어를 추구한 레비나스의 기획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데리다의 초기 사유가 이렇듯 절대적 타자의 요구로서의 정의 개념에 합류함으로써 레비나스와 공명하게 된다는 점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앞의 글이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학문적 궤적의 만남과 엇갈림을 ‘환대’와 ‘타자성’ 개념으로 풀어냈다면, 서용순의 「주체화의 두 가지 길」은 ‘주체’라는 개념을 통해 레비나스와 바디우의 사유의 관계를 탐색하고 있다. 필자는 레비나스의 주체가 ‘나를 죽이지 말라’고 호소하는 혹은 명령하는 타자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으로 정립되는 ‘책임의 주체’라면, 바디우의 주체는 능동적인 역할을 통해 진리와 세계의 역동적인 관계를 이끌어가는, 그리하여 “진리를 상황에 강제”하는 ‘투사적 주체’라고 분석한다. 레비나스의 주체가 철저히 수동적이라면, 바디우의 주체는 진리에 대한 확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능동적인 주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주체성 사이에서 필자는 공통점을 찾아내고 있다. “모든 것이 계산과 수치의 합리성에 복종하는 오늘의 세계”를 극복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2부의 세 번째 글인 「상호성의 윤리와 타자 중심의 윤리」에서 필자인 김정현은 자기 존중에 바탕을 둔 리쾨르의 윤리학과, 타자 우위에 바탕을 둔 레비나스의 철학 사이에서 드러나는 타자성과 상호성의 차이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레비나스가 타자의 절대적 우위에 자기와 타자 간의 근원적 비대칭성을 상정하고, 자기(주체)가 타자에 대해 책임지는 자, 타자의 볼모로서 정립될 때 진정한 상호성이 가능하다고 본다면, 리쾨르는 ‘배려’ 개념을 통해 타자를 “가장 약할 상태에 있을 때조차도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자”로, 자기를 “타자에게서 오는 그것 없이는 결핍된 자”로 상정함으로써 양자 간의 동등성을 확립하려고 한다. 필자인 김정현은 이 두 윤리(상호성의 윤리와 타자 중심의 윤리)를 문화적 평면으로 끌고 들어와 논의를 전개한다. 문화 간 관계에서 최초의 지점(주류문화인가 아닌가)에 존재하는 비동등성을 지양하고 주고받음의 교환 위에서 정립되는 동등성을 추구할 것을 리쾨르의 ‘상호성의 윤리’가 제안한다면, 레비나스의 윤리는 평등한 문화 간 관계의 구축을 위해 “자문화 중심성의 혁파가 얼마나 지난한 과제인지”를 일깨워 준다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유대주의적 한계
‘전체성’에 대한 비판과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강조하는 레비나스의 철학은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잃었다는 개인적인 경험과 함께 유대 민족의 정체성과 분리될 수 없다. 레비나스에게 유대 민족은 여러 민족 가운데 하나이지만, 동시에 모든 인류를 위해 보편적 책임을 지는데 그것은 박해의 경험으로 지게 된 타자를 위한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3부에 실린 두 편의 글은 이렇듯 유대주의적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