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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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숨은 보석, 슬로베니아에서 보낸 92일의 기록 파울루 코엘류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주인공 베로니카는 자살을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조국 슬로베니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글을 쓴 기자에게 슬로베니아를 설명하는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탄식한다. “슬로베니아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라. 아무도.” 유럽 동남부 발칸 반도에 위치한 슬로베니아는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의 전라남북도를 합친 것만 하고 인구수는 200만 명 남짓인 소국이다. 1992년 유고연방의 해체와 함께 탄생한 유럽의 신생국으로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낯선 나라다. 지도에서 위치를 짚어보라고 하면 정확히 짚는 이도 드물다. 이름마저도 슬로바키아와 혼동된다. 그런 낯선 나라에 한국의 시인이 3개월여를 머물렀다. 시인은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장 그르니에)하는 바람을 이뤘고 그렇게 슬로베니아에서 수수하고 평화로운 삶의 길을 발견했다. 《명랑하라 팜 파탈》《말할 수 없는 애인》 등의 시집을 통해 솔직하고 개성 있는 여성의 목소리를 내온 김이듬 시인은 우리 시단의 선명한 이색異色으로 평가받는 시인이다. 《디어 슬로베니아》는 김이듬 시인이 2015년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류블랴나 대학교 파견 작가로 슬로베니아를 방문하고 쓴 여행에세이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 여러 유럽 국가들과 원활한 연결망을 가지고 있어 여행객들에게는 중간 경유지 정도로 여겨지는 슬로베니아에서 시인은 오랫동안 천천히 그곳의 사람과 자연, 문화를 음미했다. 시인이 그곳에서 경험하고 느낀 점을 책으로 쓴 것은 베로니카와 같은 심정에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슬로베니아를 모른다는 것. 단지 베로니카의 편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이 유서가 아니라 다정한 초대의 편지라는 점이다. 너무나 풋풋하고 아기자기하고 이름 속에 숨은 사랑(slovenia)처럼 수줍고 다정한 슬로베니아를 소개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좋은 친구를 소개할 때처럼 기분 좋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이 책에서 시인은 동유럽 패키지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슬로베니아의 명소―블레드 호수, 포스토이나 동굴, 프레드야마 성―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보고 매혹된 슬로베니아의 다양한 도시를 소개하고 있다. 피란과 코페르같이 지중해와 면해 있는 로맨틱한 해안 마을이나 와인 투어를 할 수 있는 메다나, 소차 강 협곡 마을 톨민, 3만 권의 장서가 보관된 카푸친 수도원이 있는 슈코피아로카, 탈 축제로 유명한 프투이 등이 그곳들이다. 시인이 이끄는 대로 글 속의 도시와 길들을 떠돌고 나면 어느새 시인처럼 느림과 여유로 가득 찬 슬로베니아의 공기와 분위기에 취하게 될 것이다. 걸을수록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사랑스러운 도시 ‘류블랴나’ 산책하기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는 시인에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로맨틱한 도시”였다. 슬로베니아의 국민 시인인 프란체 프레셰렌의 동상이 있는 프레셰렌 광장에서 다홍과 초록이 어우러진 바로크양식의 감각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프란체스코 수태고지성당을 바라보다 류블랴니차 강을 따라 작은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이 늘어선 길을 걷다보면 누구나 그런 생각에 빠질 만하다. 세 시간 정도면 도시를 대충 둘러볼 수 있다지만 류블랴나는 대충 둘러보고 서둘러 떠나기엔 너무나 아쉬운 도시다. 시인은 류블랴나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여섯 개의 산책 코스를 추천하고 있다.(128쪽) 자연과 문화를 골고루 즐길 수 있는 이들 코스를 시인의 설명과 함께 걷다보면 체코 프라하 성의 건축가로 유명한 슬로베니아 건축가 요제 플레치니크의 다양한 건축물들―트로모스토비에 다리, 국립도서관, 크리잔케 야외극장, 중앙 시장 아케이드 등―은 물론이고 국제그래픽아트센터, 종합예술센터인 찬카리에우 돔, 예술인들의 해방구 메텔코바 등을 만날 수 있다. 또한 2016년 유럽녹색도시로 선정될 만큼 풍부한 녹지(도시 면적의 75%)를 자랑하는 류블랴나의 자연이 주는 여유와 상쾌함을 피부에 닿는 듯 생생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알프스와 지중해 사이, 슬로베니아의 숨은 보석들을 만나다 알프스 산지의 동쪽 산록에 자리한 슬로베니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인 산지 국가이지만 남서부의 피란 만을 통해 아드라아 해와도 면하고 있다. 또 이탈리아와의 경계에 발달한 카르스트 지형으로 포스토이나 동굴이나 슈코찬 동굴 같은 거대한 석회 동굴을 자연유산으로 가지고 있다. 이처럼 자연의 축복을 받은 땅인 만큼 슬로베니아에는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다. 우선 율리안 알프스로 둘러싸인 블레드 호수는 그 가운데 떠 있는 블레드 섬과 함께 슬로베니아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으며 오랫동안 유럽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명소다. 북한의 고 김일성 주석이 유고연방 시절 정상회담을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풍광에 반해 14일을 더 머물렀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시인은 블레드 호수 상류의 보힌 호수도 꼭 가볼 만한 곳으로 추천한다. ‘신이 숨겨 놓은 땅’이라는 의미를 지닌 보힌 호수는 근사한 레스토랑도 뱃사공도 없지만 너무나 정결하고 한갓진 풍경을 선사하는 곳이라고 한다. 율리안 알프스에서는 아름다운 풍광 외에도 트래킹이나 스키,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많다. 다만 남녀노소가 누드로 즐기는 슬로베니아의 온천은 이색적인 체험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다. 아드리아 해의 피란은 시인이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각별한 장소로 꼽는 곳이다. 남유럽과 동유럽, 북유럽을 지리적으로 연결함으로써 그 지역들의 문화가 뒤섞인 매혹적인 도시 피란은 ‘아드리아 해의 작은 베네치아’로도 불리는 곳이다. 피란 인근의 코페르, 이졸라도 각각 특색 있는 해안 마을들로 둘러볼 만한 곳들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카바이 와이너리가 있는 메다나도 인상적인 곳이다. 슬로베니아 동북쪽에 위치한 이곳은 와인 생산지일 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문화적인 매력까지 갖추고 있는 곳으로 시인이 특히 추천하는 곳이다. 여행과 만난 시詩― 프란체 프레셰렌, 스레치코 코소벨, 알로이스 그라드니크의 시를 읽다 《디어 슬로베니아》에서 시인은 여행지에서의 감상과 어우러진 여러 시인의 시와 우리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슬로베니아 시인들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사망일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될 만큼 슬로베니아를 대표하는 시인인 프란체 프레셰렌을 비롯해 모던함과 파격적인 면에서 우리나라 시인 이상과 닮아 있는 스레치코 코소벨, 와인 생산지인 메다나를 예술의 도시로 만든 일등공신 알로이스 그라드니크까지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슬로베니아 시인들의 시를 직접 번역해 원문과 함께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 외에 최승자, 김소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헤르만 헤세, 프랑시스 잠의 시들이 열 마디 말로 부족한 여행지의 감상을 전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냥 읽어도 좋은 시들이지만 여행의 맥락에서 읽는 시들은 그 전과는 다른 새로운 울림을 전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