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정한석의 첫 영화평론집. 정한석은 2002년 『씨네21』영화평론상에 당선되며 비평 활동을 시작했고, 『씨네21』기자로 일했다. 이 책은 영화에서 육박해오는 감각들에 감응하며 그것들의 ‘성질과 상태’를 언어로 필사해낸 ‘활동하는 영화들’에 관한 질문이자 기록이다. “성질 혹은 상태라는 말을 언제부터인가 내가 자주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주 쓰는 정도를 넘어서 은근히 기대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말들로 나는 영화의 무엇을 감각하고 사유하고 싶어 한 것인가 자문하게 되었다. 하여간에 내가 개별의 영화들을 대하면서 흥미를 갖고 이 말들을 쓴 것이라면 그건 나의 영화 감각과 감정과 사유의 지향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이 말들은 내가 보유하고 있는 것들을 세련되게 총합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동경하는 것들과 좌충우돌하며 접속하다가 불가피하게 불거진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집착이 갔다. 앞서 조금은 말했지만 실은 계속 질문 중이며, 영원히 미제일지도 모르겠다. 성질과 상태에 관련된 단상은 여전히 나를 어지럽게 하고 내가 생각해도 모순은 여러 곳에서 출몰한다. 또한 언제 찾아올지 모를 나의 새로운 감각 경험들과 뒤섞여 얼마든지 다른 언어의 형태로 탈바꿈되어 재방문할 가능성도 있으므로 구태여 거창한 명제처럼 구획하고 확정해서 그 안에 갇히고 싶지도 않다. 지금으로서의 나는 그저 철저한 고유함(성질)과 활발한 막연함(상태)이라는 어쩌면 반대 극처럼 보이는 두 가지를 동시에 끌어안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는 없다. 조금 촌스럽게 비유하자면 나는 원심력과 구심력을 동시에 사랑하게 된 곡예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아슬아슬하다. 그럼에도 연관된 단상들을 보충해야 할 필요는 확실히 느낀다. 기회가 될 때마다 밝혀왔던 것 같은데, 영화란 내게 활동하는 것이고, 그 활동(성)이 체험되는 것이다. 이 활동의 체험이 성질과 상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느끼고 있다. 나는 성질-상태-활동-체험이라는 각각의 항들이 개별적으로 활성화되는 것이 가능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활성으로 만드는 서로의 인과이자 매개이자 반응이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이 항들이 서로 엮여서 만들어질 수 있는 무수한 가능성들에 관해서 수식을 늘어놓으면 그건 영락없이 주책없는 요설처럼 보일 것이므로 차라리 시도하지 않는 쪽이 나을 것 같다. 그보다는 이 네 개의 항이 서로 접속하고 이동하고 연쇄하여 이룰 수 있는 무한 변수의 확장된 감각을 상상하고 감지해보자는 제안 정도만 전하고 싶다. 1부는 영화론이라고 할 만한 글들을 모았다. 하지만 정치한 영화론이라기보다는 영화란 도대체 어떤 활력을 지닌 것인가 하는 호기심의 발로였던 것 같다. 한 편의 영화 혹은 여러 편의 영화를 전제로, 영화라는 예술의 기본적인 생동의 과정에 관심을 기울인 경우다. 2부와 3부는 동시대 국내외의 주요한 감독들의 감독론과 작품론을 모았다. 그들 영화를 절대적인 하나의 세계로 간주한 뒤 그 세계를 겪어나간 나의 모험의 경우들이다. 4부와 5부는 예상치 못한 다양한 방식으로 쟁점, 교감, 질문들을 던져준 국내외 작품들에 관한 작품론과 이런저런 기회가 주어져 쓰게 된 자유로운 단상을 묶었다. 홍상수 영화는 별도로 떼어내고 싶었고 그걸 6부로 삼았다. 감독 홍상수론이라고 부르기에는 역시나 부족하다. 정확히 말하면 홍상수라는 영화에 휩쓸려온 나의 즐거운 표류기다. 가능하다면 나는 영화에 관한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중립적 표면 위에서 활동하는 또 하나의 어중간한 무언가로 느껴졌으면 좋겠다. 혹은 영화에 관한 내 글이 개별 영화의 성질과 상태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매개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는 것이 정 어렵다면 앞서 내가 이것저것 선호한다고 늘어놓은 체험들, 그것들을 흥미롭게 기록할 줄 아는 수기이면 족하다. 그런 체험을 바탕으로 한 광의적 차원에서의 해석도 좋겠다. 물론 그런 점에서 수많은 실패의 흔적들이 여기 전부 담겨 있고, 그 무엇 하나 장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장담하며 말할 수 있다. 감각에 놀라고 혼돈스러워하고 기뻐하고 싸워보고 몰두해본 흔적 없이 정보와 지식을 앞세워 작성된 감흥 없는 비평들은 공해다. 물론 나의 글이 그런 공해였던 적이 한두 번이었을까 싶지만은 될 수만 있다면 더 흥미롭고 더더욱 흥미로워지고 싶다. 결국에 영화비평가가 자신을 괴롭혀서 끝내 되어야 할 것은 지식의 파수꾼이 아니라 감각의 지진계다.” -‘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