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
유운성 · Humanities
256p

![[왓챠웹툰] 최애 여주 대전 👑](https://an2-img.amz.wtchn.net/image/v2/L0sC9bu-g3IIedSK2KRrfA.png?jwt=ZXlKaGJHY2lPaUpJVXpJMU5pSjkuZXlKd0lqb2lMM1l5TDNOMGIzSmxMM0J5YjIxdmRHbHZiaTh4TkRRek5qZ3pPRGcwT1RBek5URWlmUS55RVNmVVB0MXF1ZXNLM29iZEFjQk9UNE15QXlyb1JvTEU5VW01UFo3NkF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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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영상에 대한 오늘날의 여러 이론적, 비평적 논의와 문제를 다루는 입문서다. 특히 영화 애호가나 전공자들 외에도 교양 독자 일반과 타 분야의 다양한 예술 분야의 작업자들에게도 유용하도록 차분히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용어와 역사를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통상적인 입문서가 아니며,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떻게 영화하는가?’ 라는 세 가지 무거운 질문에 대한 답변의 역사와 동시대적인 사유로 독자를 안내하는, 기이하고 묵직한 이론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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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범
5.0
미지의 영린이들을 위한 반영화입문서. 아직 불가해한 존재로 다가오는 에이젠슈타인, 고다르, 바쟁의 주요 논지를 찬찬히 짚어주는 세심함도 돋보이지만, 쉽게 인지하지 못했던 고전적 데쿠파주 숏/역숏의 가능성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날카로움 또한 인상적이다. - 별개로 '영화는 이론이 아니라 체험'이라 주장하며 영화에 잠재돼있는 역량을 고려하지 않는 기만적인 시네필들을 풍수지리사와 다름없다고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어딘가 뜨끔했다...
견씨네
스스로 가늠하기에 책의 약 60% 정도만을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는 느낌이다. 그 60%의 흡수마저 내 사유의 힘을 기르고 관점의 진전을 이끌어냈다고 생각해 이해한 부분을 내 언어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또 언젠가 이해할 나머지 40%를 이해하기 위해 밑바탕을 일구려는 것도 있다. 우선 이 책은 서문부터 전문용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하지 않고 들어가겠다고 선언한다. 그것이 독자들의 고취를 끝내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능동성을 발휘해야 한다. 1. 시네마는 변증법적으로 파악된다 영화는 무엇인가? 라고 묻는 흔한 질문. 그리고 앙드래 바쟁이 쓴 제목으로 더욱 유명한 이 질문이 실은 잘못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영화는 하나의 단일한 가치로 설명되는 것이 아닌 변증법적으로, 쉽게 말해 여러 대립항들 사이를 비교해가며 항상 움직인다. (알랭 래네의 인터뷰 중 한 대답이 기억난다. 영화는 물처럼 흐릅니다.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 이해하지 못했지만 무슨 함의를 지니는지 알 것 같다) 유운성 평론가는 히치콕의 <현기증>을 예로 장치들간의 유추적 관계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변증법적 사물로서의 시네마(영화 대신 일부로 시네마라고 표현한다)를 단 하나의 물리적 사물로 실체화하는 것의 폐해를 보여준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상상을 이끌어내는 여러 장치들이(대표적으로 언어)가 그것의 상상을 소거한 후 단 하나의 물리적 사물로 치환되어 버렸다. 그것은 관객을 비주체적으로 만든다. 영화를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여겨야 하는데는 여기에 있다. 영화를 보며 영화 너머를 상상해야 하고 보여지는 이미지들을 맥거핀으로 여겨야 한다. 이를 위해 질문은 멈추지 말아야 하며 변증법적 추론은 계속돼야 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단 하나로 치환하는 것은 정말로 위험하다. 치환은 추론을, 추론은 상상을 막는다. 이를 되살리려 하는 예로 홀리스 프램튼의 미디어 아트 <노스탤지어>를 보여준다. 간단히 말해 이 작품에선 언어적 정보와 시각적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다. (내가 고다르의 미치광이 삐에로를 보며 혼란스러웠던 이유이기도 한) 언어와 시각 사이의 간극. 그 간극으로 인해 공존할 수 없는 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 불일치(간극) 안에서 내가 보는 현실 너머에 무엇이 잠재되어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진정한 말은 발화된 것과 발화되지 않은 것의 변증법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발화되어 현실화된 의미 외에 어떠한 잠재적 뜻도 지니지 않는 말, 메시지란 그처럼 말이 아닌 말을 가리키는 것이다" 보고 듣는 것에 간극이 없다면, 내가 듣는 소리가 내가 보고 있는 것이라고 당연시 여기는 이런 수동성에 기댄다면 난 그 현실의 맥거핀에 빠져 잠재적인 것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변증법적 태도는 영화를 보는 것 너머, 만드는 것,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세상을 만드는 것에도 필요한 태도인 것 같다. 현실은 언제나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양립하며 아이러니하게 어떤 결여를 품고 있으니까. 2. 에이젠슈타인과 바쟁의 접점 에이젠슈타인의 저작이나 영화는 본적이 없고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를 보다가 어려워 놓은 나로서는 이 책에서 보여주는 두 명이 영화사 안에서 그린 지도를 보는 게 행운이었다. 바쟁은 관념론적 역량주의, 에이젠슈타인은 유물론적 유령주의의 입장이다. (여기서 유령과 역량이라는 개념은 유운성 스스로가 재정의한 표현으로 책을 읽어봐야 이해할 수 있다) 유운성 평론가는 각자의 유령과 역량이 대립하는 것이 아닌 변증법인 관계에 있다고 한다. 에이젠슈타인은 영화를 몽타주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이 표현이 이 책으로부터 다소 왜곡된 것을 알지만 그래도 가독성을 위해 사용해본다. 평론가님 쏘리..)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을 세워놓고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네마는 나오고, 동시에 시네마는 그것을 가능캐한다. 에이젠슈타인은 몽타주라는 원리 자체가 영화보다 선행한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생성, 변형하는 것 그 자체. 바쟁은 초기에 그가 주장한 '완전영화'에 의하면 어떤 기술적 실현 이전에 '신화'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리얼리즘은 그 신화에 다다르려다 실패함에서 고민하는 문제다. 계속해서 두드리고 실패하기에 신화는 영원히 영화로부터, 현실로부터 거리를 둔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아도 신화이기에 역량이라는 이름을 붙여진 채로 분명히 작동한다. (마치 라이트 형제 이전부터 이카로스의 날개라는 신화가 비행의 욕망을 실현시킨 것처럼) 이는 에이젠슈타인의 끊임없는 의미의 생성이라는 부분과 반대에 가깝다. 바쟁은 이러한 간극이야말로 영화미학의 자리라고 여긴다. 분명히 존재하는 플라톤적 이상에 다가가다가 실패하는 것으로부터 어떤 질문을 얻는 것 말이다. 유운성 평론가에 의하면 이는 아카이브, 즉 보존성이 짙은 시네마이기에 안티휴머니즘적이다. 그러던 바쟁이 1950년대가 되며 영화를 다른 예술을 위한 기능적 예술로 대체하며 에이젠슈타인의 유령주의와 조우하게 된다. 유령처럼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추론하는 것처럼 바쟁은 영화를 다른 예술과 수평적 위치에 놓음으로써 그들의 체계 속에서 사유해 에이젠슈타인의 유령주의와 비슷한 성격을 띠게 된다. 유운성 평론가는 이를 '무에 대한 헌신'이라고 명명하는데 평소에 내가 생각하는 영화 그리고 예술의 조건이 언어화된 것 같아 인상깊었다. 무언가를 위해 스스로를 시간 속에서 지워간다는 것. 어떻게 보면 영화는 결국 영화관 밖을 나가는 관객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영화 속에 머무르게 하는 영화는 옳지 않다. (이는 지극히 내 영화에 대한 가치관이다) 따라서 유운성은 이를 지금의 VR, 가상현실 등과 연결지으면서 우리의 눈이 완전한 재현을 향해가는 지금과 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완전한 재현은 논의를 가로막는다. 이를테면 몽타주를 하려는 두 개의 이미지가 있다고 치면 둘은 완전히 같아서 안된다. 의미의 발생은 차이로부터 오는데 완전한 재현은 그 논의를 막아낸다. 그건 앞서 <현기증>에서 본 유추론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 단일한 대상으로 실체화되는 것의 폐해와 같다. 지금의 완전한 재현, 그리고 단일한 매체 (이를테면 ott도)는 간극을 없애 의미발생의 가능성을 없앤다. 3. 장 뤽 고다르 그렇다면 지금 이러한 세태 속에서 이미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미지를 보며 어떻게 변증법적 사고를 할 수 있는가? 유운성 평론가는 이 물음을 던지는 자로 장 뤽 고다르를 설명해준다. 여기서부터 고다르의 성취라고 일컫여지는 점프컷의 탄생 비화와 그가 고전적 데쿠파주를 어떻게 변주하며 변증법적 시네마를 보여주는지 설명해준다. 지금까지 나조차 이 영화의 점프컷 장면을 '점프컷의 최초의 탄생' 이라고 여겼었다. 허나 실은 이 장면은 상당히 고전적인 데쿠파주(서로를 바라보는 숏과 역숏) 위에서 변주된 것이며 갑자기 발명된 것이 아니다. 하나의 얼굴 뒤에 상대의 얼굴이 붙여졌을 때 유지되는 분위기, 뉘앙스, 정보의 전달, 의미가 점프컷에서 한 사람만의 얼굴서만 느껴질 수 있는가? 즉 하나의 얼굴을 보면서 숏의 접합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러 추론과 상상을 할 수 있는가다. 이를 포함해 고다르의 마지막 작품인 <이미지 북>에서 나오는 여러 영상들의 조합, <자니 기타>의 변주 등을 미루어보면 고다르는 지금 숏과 숏의 접합이 지니는 가치를 재확인하는 감독임을 알 수 있다. 그 중 고다르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모호한 얼굴이다. 모호한(무표정한) 얼굴은 그 자체로 의미발생을 하지 않고 반드시 그 전후의 숏이 필요하다. 그래야 맥락의 생성을 통해 그 얼굴을 관객이 '주체적으로' 추론하고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역량없는 단독적 이미지들의 교환은 가치를 생성해 낸다. "만일 몽타주를 통해 감정을 유발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무표정한 이반 모주킨의 그것처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얼굴이야말로 사실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얼굴이다." "얼굴이 곧 영혼이라는 말은 얼굴 이면에는 그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얼굴을 찍는 일이 곧 영혼을 찍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미지는 중립화되어야 한다. 그 중립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망각을 통해서다.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에서는 여러 이미지를 결합해서 보여주는데 이 이미지를 보며서 출처를 생각하면 안된다. 그 때 "아! 그 영화구나!" 라고 생각하면 바로 이미지에 편견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저 이미지를 이미지로 받아들이고 <영화의 역사>라는 새로운 생태계에서, 마치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것처럼 출처를 잊고 받아들여야 이미지 자체의 몽타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유운성 평론가는 이를 두고 고다르가 이상적 관객의 기준이 되고자 한다고 평한다. 이 뒤부터 나오는 에이젠슈타인의 '자본' 과 오브라조 개념은 이해하지 못했고 구심력/원심력 부분은 끄덕여지나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아서 아무래도 뒤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이외 다른 내용 중 후반 압바스 카이로스타미에 관한 이야기는 위에서 내가 이해한 '변증법적 대상의 시네마'의 연장선상으로 이해했다. 나중에 한번 더 봐야 할부분. 내가 이 책을 전부 다 본 후 느낀 것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영화는 변증법적으로 파악되어야 하며 그러기에 위해 언제나 유추론성을 띄어야 한다. 그것이 관객의 주체성과 자율성 참여성, 그로부터 나오는 영화 밖을 뻗어나가는 상상을 가능케한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현실에 드러나는 이미지 너머 잠재적 무언가다. -어쩌면 영화에서 몽타주 기법이 수많은 기법 중 제일 중요한 이유가 그것이 영화와 관객의 만남을 은유화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사람을 첫인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사람 또한 이미지다. 이를 몽타주 식으로 생각해본다면 영화라는 이미지와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만나서 제 3의 의미를 생성시킨다는 것이다. (그 3의 이미지가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이 비평의 역할이 아닐까?) 따라서 영화에서 몽타주를 통해 발생하는 제 3의 의미를 보는 건, 내가 영화를 봄으로써 느끼는 어떤 의미, 정서, 감정을 시청각을 통해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요즘 영화를 보면서 주요하게 보는 건 영화에 사용되는 여러 장치들, 이를테면 교차편집이나 나레이션 혹은 의도적인 생략 등이 그저 서사를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닌 '나에게 어떤 뉘앙스를, 감정을 느끼도록 요구하는지'다. 난 이걸 나만의 언어로 '대화'라고 표현해본다면 내가 이 책을 보면서 발견한 몽타주의 역할 역시 어떻게 관객과 밀접하게 대화하는지 고찰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그저 숏과 숏의 이음을 자연스레 여기기보다 그것이 이어지는 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그게 유지되는지까지 더욱 생각해보고 상상해볼 예정이다.
rizu
4.0
영화 속에 존재하는 희망, 영혼, 실재, 비관, 침묵, 파편, 도피, 예술. 당신 안에서 끝없이 재생되고 무한히 확장되어 흡수 될 숱한 영화들.
善友
5.0
영화를 이론적으로 보는 데에 회의적이어서, 눈 가리고 아웅하던 나의 두 눈을 손수 띄어주시는 일종의 계몽서(啓蒙書)
푸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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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입 완료 in 국현미.
여욱
4.5
시네마는 뒤를 돌아보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이기도 하고 그러한 시선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에우리디케이기도 하다. 시네마는 바라보고 드러내는 이 영원한 관계 속에서만 찰나적으로 포착된다. 고다르에게 영감을 주었음이 분명한 모리스 블랑쇼는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향하여 내려갈 때, 예술은 밤을 열리게 하는 권능”이라고 썼다.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 그러니 오르페우스는 초조할 수밖에 없다.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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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는 뒤를 돌아보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이기도 하고 그런 시선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에우리디케이기도 하다
미로
3.0
엄밀한 의미에서의 이론을 갖춘 '영화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와 관련된 기존의 문헌들을 읽고 또 문헌들을 생산하는 분과로서의 '영화 연구'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교양서 성격의 입문서를 쓰는 데 활용할 이론적 도구 또한 전무하다. 이런 사정은 영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흔히 예술이라 불리는 모든 영역에서 마찬가지겠지만, 적어도 다른 예술들은 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역사적 두터움을 지니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이론적• 역사적 취약함은 생산자와 수용자 각각으로 하여금 영화를 대하는 방법의 문제를 두고 끊임없이 스스로 고민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 어떤 절대적인 이론적 접근도 허용하지 않고 역사적 사례에 호소하는 일도 무력하게 만드는 영화의 강고한 모호함이야말로 그 주변에서 온갖 쟁론들이 펼쳐지게끔 하는 역동적 동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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