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삶이 문학으로 남는 순간을 뜨겁게 새겨온 우리 시대 대표 작가 권여선, 그의 시작점에 놓인 첫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를 새롭게 다듬어 한국문학전집 제31권으로 선보인다. 소설집 『각각의 계절』(문학동네, 2023)과 『안녕 주정뱅이』(창비, 2016) 등의 작품을 통해 각별한 비평적 주목과 더불어 독자들의 너른 사랑을 받아온 그의 소설세계에서 『푸르른 틈새』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덜 이야기된 작품이었다. 기억의 강력한 자장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 누군가의 배반으로 남은 상처의 자국,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뜻밖의 사건, 그것들 아래에 은근하면서 강하게 깔려 있는 정치적인 분위기 등 권여선 소설의 독특한 형질을 이루는 이 모든 것이 담긴 『푸르른 틈새』는 권여선의 소설세계가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촉발되어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알게 하는 중요한 문이자, 21세기 한국문학의 빛나는 성취를 새롭게 발견해내기 위해 시작된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의 목표에 어느 때보다 부합하는 목록이다. 1996년 출간된 작가의 등단작 『푸르른 틈새』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모든 것을 새로이 겪는 ‘미옥’을 통해 청춘과 성장의 의미를 되짚는 작품으로, 인물의 한 시절이 작가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예리한 유머로 구현된 청춘소설의 새로운 고전이라 할 수 있다.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은 무렵, 미옥은 우연히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알게 된 지명호를 마주치고는 그를 따라 고풍스런 학사 주점으로 향한다. 미옥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학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곳에서 미옥은 자신에게 조심스러우면서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차종태와 불온한 모든 것에 경계 태세를 취하는 류한영,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논쟁적인 화제를 주저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정수진, 소위 말하는 ‘여성적인 매력’을 맘껏 발산하며 이후 미옥으로 하여금 ‘여성스러움의 신비’를 동경하게 하는 노미혜와 만나게 된다. 술잔을 주고받는 중에 그들은 학생운동에 대해 날 선 대립각을 세우며 첨예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그 모든 것이 미옥에게는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대학 풋내기 시절 내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면 그건 한시바삐 어른이 되는 것이었”고, “어른이란 모름지기 ‘정치’와 ‘성’에 대해 확고부동한 입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미옥은 그들과 어울리며 그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청춘의 시기를 통과해나간다. 상쾌함과 진득함이 범벅된 청춘의 오묘한 시기를. * 이 책을 통해 나는 잃어버린지도 모른 채 살았던 내 과거와 만나며,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후미진 과거를 남몰래 애도한다. 책갈피를 서너 장만 넘기면, 나는 어느새 스무 살 풋내기 시절로 돌아가 있다. 그녀의 문장 속에서는 예리한 지성과 따스한 멜랑콜리가 불안하게 공존한다. 권여선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내게는 그저 작가 한 사람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직 완전히 떠나오지 못한 나의 이십대, 내 소중한 벗들의 이십대가 동시에 덮쳐오곤 한다. _정여울(작가, 문학평론가) 『푸르른 틈새』가 세상으로 나온 이후 삼십 년 가까이 권여선의 소설을 따라 읽어온 우리가 모를 수 없는 것은, 과거로부터 쏟아지는 기억의 빛은 끊임없이 흘러나와 새로운 이야기로 살아난다는 사실이다. (…) 틈새는 갈라져 있는 좁은 간격이지만, 그 자체의 면적을 지닌 공간이기도 하다. 지난날의 상처가 찢어버린 흔적이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 기억이 비쳐 들어오는 통로이기도 하다. 우습고 어설프고 어정쩡한 자세로 청춘을 보내왔다고 생각한 이, 이유를 알 수 없이 슬프고 아팠던 청춘을 보낸 이가 영원히 빛을 바라볼 수 있는. 그래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날개를 달아 날아갈 수 있는.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틈새는 장소다. 푸르기에 더욱 슬프고 아름다운. _인아영(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