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동네포에지를 시작하며
“어떤 시집이 빠져 있는 한, 우리의 시는 충분해질 수 없다.”-문학동네 복간 시집 시리즈 문학동네포에지를 시작하며
1.
2020년 11월 문학동네 복간 시집 시리즈인 문학동네포에지를 시작합니다. 1차분 열 권을 우선으로 선보입니다. 문학동네는 일찌감치 이 작업을 시도한 바 있습니다. 1996년 11월 ‘포에지 2000’ 시리즈의 펴냄 아래 황동규, 마종기, 강은교의 청년기 시집들을 복간하며 그 명맥을 이어나가던 바 있습니다. “예민한 감성과 날카로운 직관으로 시대의 혼돈과 상처를 노래했던 젊은 영혼의 생생한 울림이 담긴 추억의 명시들을 독자 앞에 다시금 제시함으로써 빛나는 시의 정수를 확인하고자” 하려 함이라는 취지의 글이 떠오르는데, 그때로부터 근 24년이 흘렀습니다. 그 정신은 온전히 두고 그 매무새를 새로이 다지는 과정 가운데 문학동네포에지의 첫 행보를 내딛기까지 시간이 오래 좀 더디 걸린 것도 사실입니다. “옛 시집을 복간하는 일은 한국 시문학사의 역동성이 현시되는 장을 여는 일이 되기도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 선언한 책임과 의무의 말이 실은 얼마나 큰 무게인지 모르지 않은 까닭입니다. 시라는 무한과 시집이라는 열림을 끌어안으려는 데 있어 한껏 오므라들었다 힘껏 펼칠 줄 아는 시리즈라는 줄자, 이를 가능케 하는 힘은 아무려나 사랑에 있음을 이제는 깨닫고 온전히 그 순정에 기대어 용기를 낼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2.
문학동네의 신간 시집 시리즈인 문학동네시인선이 어느덧 150번째 시집을 눈앞에 두고 있는 가운데 출범하게 된 문학동네의 구간 시집 시리즈인 문학동네포에지는 복간의 기저를 비단 문학동네에 적을 두었던 시집만을 필두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특징으로 합니다. 반드시는 아니더라도 이왕이면 읽어둬도 참 좋으련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오랜 시간 서점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시집들이 우리에게는 꽤 있었습니다. 문학동네포에지는 시간을 거슬러 찬찬히 행하는 시로의 이 뒤로 걷기를 통해 파묻혀 있을 수밖에 없었던 시집을 발굴하고, 숨어 있기 좋았던 시집을 골라내며, 책장 밖으로 떨어져 있던 시집을 집어 서가에 다시 꽂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음으로써 한국 시사를 관통함에 있어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시의 독본들을 여러분들에게 친절히 제공해드릴 참입니다. 출발의 본거지는 제각각 달랐으나 도착의 안식처는 모두 한데로, 문학동네포에지 안에서 유연성 다해 섞이고 개연성 있게 엮인 가운데 한 차에 열 권씩 펼쳐질 시의 병풍은 저마다 다양한 개성으로 저마다 독특한 양식으로 저마다 특별한 사유로 시리즈라는 줄자에서 보다 큼지막한 테두리로 우리를 시라는 리듬 속에 재미 속에 미침 속에 한껏 춤추게 할 것입니다. 특히나 귀하디귀하다 싶은 것이 시인들의 첫 시집임을 알아 그 최전방에 첫 시집들을 앞서 배치한 것인데 김언희, 김사인, 이수명, 성석제, 성미정, 함민복, 진수미, 박정대, 유형진, 박상수 시인에 이어 출간될 2차분 역시 김옥영, 이문재, 염명순, 안도현, 정은숙, 조연호, 김민정, 최갑수, 이영주, 이현승 시인의 첫 시집임에, 복간에 있어 첫 시집을 앞서 염두에 둔다는 원칙 역시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3.
문학동네포에지는 문학동네시인선과 책 사이즈가 같습니다. 세상의 시계와는 완연히 다른 시의 시간 속에 이 두 시리즈가 맘껏 뒤섞이는 난장 속에 시집 시리즈의 건강함을 기대하였고, 맘껏 뒤섞이는 자연 속에 시집 시리즈의 무구함을 기약한 것도 애초의 기획 의도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표지 디자인의 중심을 컬러에 놓은 것도 둘의 공통점입니다. 문학동네시인선이 핀 꽃이거나 필 꽃이라 할 때 문학동네포에지는 꽃이 있다 떨어진 꽃자리이거나 꽃 없이 진 꽃을 기억하는 등산로 앞 의자라 할 적에 그 컬러의 생겨먹음이 필시 달라야 할 것이라는 짐작이 내내 따라붙었습니다. 힘을 빼고 또 뺐습니다. 등을 펴고 또 폈습니다. 그렇게 비우고 그렇게 꼿꼿해지는 과정 속에 문학동네포에지는 파스텔톤의 열 가지 컬러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해설이 따로 실리지 않는 시집 시리즈, 추천사도 따로 박히지 않는 시집 시리즈, 시인의 약력과 시인의 자서와 시인의 시로만 꿰는 시집 시리즈, 시인의 시 가운데 미리 보기로 어떠한가 싶어 고른 한 편의 시를 책 뒷면에 새기는 일로 시집의 단장을 마치고 시집의 장단을 맞춘 시집 시리즈, 이에는 색보다는 물의 수위가 높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한 차에 열 권씩 출간하려는 작정은 예의 과정에서 비롯한 작정이기도 합니다.
4.
구석구석 모자람도 클 것입니다. 걸음마에 넘어짐은 자석 근처의 철심 같은 것, 하여 많은 분들이 넘어질 적마다 넘어졌구나 가리키시고 가르쳐주셔야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나갈 수 있음을 압니다. 모쪼록 새롭게 시작하는 문학동네포에지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사랑으로 지켜봐주시면 여한이 없을 성싶습니다. “사랑이란 죽은 이도 거의 소생시킬 수 있는 것”이란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 힘입어 “사랑이란 죽은 시집도 거의 소생시킬 수 있는 것”이란 우리만의 변주로 그이가 부추긴 ‘사랑의 함대’를 비유 삼아 오늘 이렇게 문학동네포에지라는 배를 물위에 띄워보는 바입니다.
■ 편집자의 책소개
시인이자 소설가 성석제의 시들을 묶어 문학동네포에지 『낯선 길에 묻다』로 펴낸다. 재기발랄한 위트와 유머 속에 날카로운 풍자를 담아내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소설가 성석제로 보다 익숙할 그의 출발은 ‘시인 성석제’였다. 1986년 『문학사상』 신인 발굴 시 부문에 당선되어 집필을 시작한 그는 1995년 『문학동네』에 단편소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발표하며 소설가로 변신하기까지 두 권의 시집을 통해 자신만의 시 세계를 선보인 바 있다. 문학동네포에지는 성석제의 첫 시집 『낯선 길에 묻다』와 두번째 시집 『검은 암소의 천국』을 한 권으로 묶어 선보인다. ‘쓰는 사람’ 성석제의 출발, 그 귀한 시작을 엿본다.
사랑을 사랑하는 이상한 사랑도 있었네
그의 시에서 소설가로서의 면모를 자꾸만 들춰보려는 것은 수상한 유혹이겠으나, 그의 소설이 가진 특유의 압축성, 짧고 묵직한 ‘펀치’로 우리의 사고를 단번에 깨쳐주는 힘의 원천을 엿보려는, 엿보았다는 편견을 피하기는 쉽지 않다. 문학의 시원은 본디 하나라는 지당한 말씀에 기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수한 단어와 문장이 그를 통과해간 지금도 “시를 쓰고 있을 때의 나를 부러워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개정판 시인의 말」)는 그이니, ‘시인 성석제’의 세계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시간으로 퇴색되지 않는 제 목소리, 저만의 결을 이루고 있음이다.
첫 시집 『낯선 길에 묻다』에서 그의 탐구는 삶과 죽음이라는 근원적 질문, 존재의 본질을 향했다. 그리고 6년에 걸쳐 이 질문에는 일상의 희비극, 현실의 면면들이 섞여들어 『검은 암소의 천국』으로 나아간다. 서사와 서정을 두루 살피며 나아가는 그의 시력은 결국 ‘길에 묻고’ ‘길을 묻는’ 끝없는 숙고일 것이다.
나는 그 길로 가지 않았네
성석제의 ‘낯선 길’과 ‘검은 암소의 천국’은 세상의 가장 후미진 곳, 어둡고 누추한 풍경이다. “골목 가장 깊은 곳” “창은 늘 닫혀/개만 사납게 짖어”대고 사람들이 “멈칫거리다 돌아나오는” 곳, “아이들도 그곳으로는 공을 굴려보내지 않는다”는 그 집(「그곳엔 누가 사는지」). 이곳에 어른거리는 한기, 스멀거리는 어둠은 죽음의 그림자다. “집이란 지어질 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는/생물표본과 같은 것”이어서 “시멘트는 시멘트대로 날아가며/모래는 모래대로 떨어져나”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시인은 문득 묻는다. “그 속에 살아야 할 우리는/어쩌란 말인가”(「집수리」).
“천만 원 때문에” “천만 원이 못 되는 재산” 때문에 수술비를 댈 수 없어 죽어야 하는 이가 있고(「아버지와 아들」) “시장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