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의 희망과 집값 불안의 한복판,
브랜드 아파트 단지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
“전환기의 아파트 거주 공동체를 이토록 세밀하게 짚어볼 수 있는 것은
인류학자 정헌목의 꼼꼼하고 성실한 시선 덕분이다.”-박해천(『콘크리트 유토피아』, 『아파트 게임』 저자)
“이 책은 아파트가 아니라 거기 살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애정 어린 통찰이다.”-조형근(사회학자, 한림대학교 연구교수)
“아파트 단지는 무관심의 문화를 넘어 공동체적 삶을 생산해내는 장소가 될 수 있을까?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를 위한 노력은 집단이기주의를 넘어 시민적 공공성의 출현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이 책은 이런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조한혜정(문화인류학자,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동시대 한국 사회 욕망과 희망의 집합체,
아파트 단지의 민낯을 낱낱이 들여다본 최초의 인류학 보고서
단순히 주택 유형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형태로서,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선망의 대상이자 비판의 대상이기도 한 아파트. 아파트는 수십 년간 가장 주요한 자산증식 수단이자 많은 이들이 중산층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어준 동시에, ‘집단이기주의의 온상’ 혹은 ‘부동산 투기의 주범’으로 비판받아왔다. 최근 몇 해 사이에 아파트 단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꾸준히 증가해왔다. 아파트가 지닌 사회문화적 함의에 대한 분석, 중산층을 형성한 장치로서 아파트를 살펴보는 논의, 소통을 제약하는 아파트 단지의 구조에 대한 비판 등을 담은 의미 있는 단행본이 여럿 출간되었고, 정책적 차원에서도 아파트의 문제점을 넘어서고자 하는 ‘마을공동체’와 같은 접근이 시도되고 있다.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는 한국의 브랜드 아파트 단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로 직접 걸어 들어가 그 속내를 낱낱이 들여다본 최초의 책이다. 인류학자 정헌목은 수도권의 한 브랜드 아파트 단지에서 2년여의 시간 동안 현장연구를 수행했다. 책의 무대인, ‘성일 노블하이츠’라는 가명으로 등장하는 아파트는 과거 ‘성일주공아파트’(역시 가명)가 있던 10만여 평 부지를 재건축해 지어진 90여개 동 9000가구의 대단지다. 이곳에서 저자는 입주민들을 만나고, 입주자대표회의와 각종 자생단체의 활동을 비롯해 단지 내부에서 벌어지는 다종다양한 사건들을 관찰하고, 재건축이 시작되던 2005년부터 8년여 간 온라인 입주민 카페에 축적된 수만 건의 게시물과 댓글을 모두 읽으며 ‘아파트 단지’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전개된 입주민들의 상호작용을 분석했다. 이처럼 장기간에 걸친 꼼꼼하고 치밀한 관찰과 기록을 통해 ‘수도권 브랜드 아파트 단지’라는 공간에서의 삶의 양식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 책은 아파트라는 주거공간에 대해 당위적, 규범적 관점이나 가치판단을 접어두고 실제 삶의 현장 그 자체를 바라보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한국 인구의 절반 이상, 도시민의 70퍼센트 이상이 아파트 단지에 거주한다. 지금껏 지적되어온 여러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아파트가 여전히 가장 인기가 많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주거를 둘러싼 사람들의 실제 욕망과 실천을 직시해야 한다. 인류학 현장연구의 미덕을 잘 보여주는 이 책은, ‘광고 화면 속이 아닌 실제 아파트에서의 삶은 무엇인가? 입주민들의 욕망은 실제 삶에서 어떻게 실현되거나 좌절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현실적이고 생생한 대답이다.
이것이 바로 2010년대 브랜드 아파트 단지라는 연구대상, 즉 내가 찾은 ‘현장’에서 맞닥뜨린 현실이었다.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예전 같지는 않은 ‘아파트 불패 신화’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아파트 가격에 민감해진 주민들. 예전처럼 잦은 매매를 통해 자산을 불려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지속되기 어려운 환경에서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오랫동안 같은 단지에서 삶을 영위하게 된 주민들. 한 편의 인류학 민족지를 작성하기 위해 내가 만나야 했던 ‘현지인’들은 이런 사람들이었다.(32)
엄밀히 말해 강남의 아파트 단지와 비(非)강남의 아파트 단지가 처한 상황은 다르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 사회의 돈과 권력이 집중된” ‘강남’이라는 지역성 자체가 강남의 아파트 단지들에 어느 정도 ‘부동산 가격의 하방경직성’을 담보해주는 것과 달리, 강남 이외 지역의 아파트 단지들에는 주택 가격을 좌우하는 요인들이 다종다양하다. 경제적·사회적 자원과 학력 자본에서 강남이 최상위에 놓여 있는 현실에서, 강남에 진입하지 못한 사람들이 한국의 주류 사회를 지배하는 ‘위세 경쟁’을 계속하려면 끊임없이 강남을 향한 모방 기제에 충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38)
1970년대 이래 한국의 도시를 뒤덮은 아파트 단지의 확산은 단순히 대량 복제를 통한 특정 주거모델의 확산에 그치지 않았고, 그 모델에 내재한 새로운 습속의 확산까지 포함했다. 이 책에 등장한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 자신이나 주변 사람이 아파트 단지에 살아왔고, 아파트 단지의 반복적인 매매에 바탕을 둔 자산 증식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또 이들은 내부적으로 다소 가격차가 존재하긴 하지만 ‘단지 단위’로 매매가가 형성된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입주민 공동의 차원에서 대응에 나서야 할 필요성도 절감하고 있었다.(336)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면, 아파트 단지가 삶이 영위되는 장소 자체라는 것이다. 아무리 아파트가 삶으로부터 소외된 투자대상, 언젠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하는 일시적인 주거지로 여겨진다 하더라도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공간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 때문에 피할 수 없이 생겨나는 일종의 ‘정치적 각성’의 계기들이 존재한다.(349~350)
대단지 브랜드 아파트라는 한국 사회 삶의 표준이 만들어지기까지
단지를 둘러싼 담장, 입구를 통제하는 경비초소와 차단기, 고층 아파트 건물 사이의 정원 같은 조경, 단지 내부에 자리한 각종 상가와 초등학교. 한국의 도시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대단지 아파트의 일관된 특징들이다. 한국 사회에 도입된 이래, 대량 공급을 위한 획일적인 공간배치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는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선호하는 주거형태가 되며 일종의 ‘삶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 표준은 ‘아파트 단지’라는 외적 형태뿐 아니라 그 안에서 구성되는 삶의 양식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대단지 브랜드 아파트’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의 지배적인 주거 양식이 되었는지를 살피는 한편, 아파트 단지에 대한 선호가 형성되어온 사회적 맥락을 짚어나간다. 이야기는 브랜드 아파트의 직계조상이라 할 수 있는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인 마포아파트에서 출발한다. 이후 생활양식의 근대화를 꾀하려는 권력의 의지에 힘입어 무서운 속도로 시민아파트들이 지어지지만, 부실공사로 인한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가 일어나며 한국의 아파트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중산층을 타깃으로 삼는 ‘단지’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한강맨션과 반포아파트가 지어진 1970년대에 이르러 한국의 아파트 단지는 모델하우스를 통한 선분양 관행과 단지 안에서 생활의 편의를 모두 누릴 수 있는 근린주구 개념이라는 모델을 보편화하게 된다.
이어서 저자는 아파트 단지가 1980년대와 1990년대 엄청난 규모로 확산되게 된 정치적 배경을 짚는 동시에, 이 시기를 거치며 아파트가 실제로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1990년을 전후해 30세 미만 인구의 절반 이상이 원하는 주택 형태로 아파트를 꼽게 되는 등, 한국인들이 아파트를 점점 더 선호하게 된 데는 객관적인 이유와 원인들이 있었다. 입식 부엌, 수세식 화장실 등 아파트를 통해 소개된 서구식 생활양식은 실생활의 편리로 다가왔고, 아파트는 이웃의 시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문화나 핵가족에 적합한 공간 배치 등 전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