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오혜진
5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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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프리즘, 한국문학을 읽는 새로운 기준 여성혐오, 소수자혐오, 순문학주의, 계몽주의, 세계문학상 집착 한국문학(장)을 떠받쳐온 관성과 폐습에 맞서, 우리 세대의 ‘정치적 취향’을 탐구할 권리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문화과학』, 2016)이라는 글로 한국문학계와 인문학계 전반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활약해온 문학연구자 오혜진이 첫 단독 저작을 펴냈다. 당시 그는 2015년 신경숙 표절 사건을 한국문학비평계의 낡은 교양과 감수성이 집합적으로 드러난 계기로 사유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이는 단순히 비평의 권위를 회복함으로써 한국문학(장)을 정화할 수 있다고 본 당시 ‘문학권력 비판론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문단권력’ 혹은 ‘문학권력’을 격렬히 비판한 논자들조차 한국사회의 급변하는 사회문화적 조건을 포착하지 못한 채 20세기적 계몽주의 프레임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권력 비판론자들조차 기민하게 의식하지 못한 그 ‘변화’란 곧 새로운 문학주체, 독자층의 출현이다. 젊은 여성 독자를 주축으로 형성된 이들 문학주체는 페미니즘을 비롯한 소수자정치가 부상하는 맥락에서 강력하게 등장했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OO계_내_성폭력’, ‘#MeTOO 운동’, ‘#나는 페미니스트다’ 선언, 낙태죄 폐지를 외친 ‘검은 시위’와 같은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소수자운동/문화의 경험을 축적한 이들은 한국문학(장)의 견고한 남성중심주의, 여성혐오 및 소수자혐오 경향에 이의를 제기해왔다. 이로 인해 한국문학이 자부해온 ‘보통 사람들의 민주주의’는 모조리 심문되는 중이다.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은 한국문학(장)에서 감지되는 바로 그 퇴행의 징후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페미니즘과 소수자정치에 입각해 한국문학의 새로운 기준을 모색한 결과물이다. 1부와 2부에서는 떠오르는 (여성) 문학주체들의 경험에 주목하며 ‘정상적인 것’, ‘정당한 것’으로 승인돼온 주류 한국문학계의 지배질서와 기율들을 의심해본다. 3부는 우리가 관습적으로 상상해온 여성 서사의 모든 지점을 과감히 ‘떠나보는’ 방식으로 여성작가들의 소설을 읽는다. 4부에서는 한국사회의 ‘성적 배치’와 정상성을 편향적이고 작위적인 것으로 폭로하는 ‘퀴어’의 문화정치가 다뤄진다. 마지막 5부는 용산참사, 세월호참사 등의 사회적 참사를 따라가며 한국사회가 관철해온 ‘공동체’ 혹은 ‘공감과 애도의 형식’을 면밀하게 살핀다. 소설을 비롯해 극영화, 다큐멘터리, 웹툰 등의 디지털 매체를 가로지르는 이 비평들을 통해 우리는 문학(성) 자체를 끊임없이 갱신하게 될 것이다. 한국문학의 체질에 관하여: 여성혐오, 소수자혐오, 순문학주의, 계몽주의, 세계문학상 집착……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신경숙 표절 사태 그리고 그 사태가 촉발한 문학권력 논쟁은 한국문학계의 퇴행적 욕망이 드러난 ‘계기’였다고. 또한 다르게 물어야 한다. ‘문학/비평의 타락’이라는 손쉬운 언표가 무엇을 감추고 있었는지. 한국문학의 개탄스러운 현실을 ‘수준 미달’의 작가 신경숙 및 상업주의와 결탁한 창비의 ‘타락’으로 돌리는 것은 심각한 전가의 혐의가 있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문학이 독자를 거의 다 잃어버리고 게토화되기까지의 상황을 충분히 설명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K문학’이라는 멸칭으로 명명되는 ‘한국문학’ 특유의 ‘체질’이 여기에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은 애써 회피되어왔다. 가부장제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여성에 대한 물리적, 상징적 폭력 및 도식적 재현을 필수적으로 경유하는 한국문학 전반의 여성혐오, 외국인 이주노동자 및 장애인, 노동자, 성소수자 등에 대한 재현의 윤리를 고려하지 않는 소수자혐오, 장르문학을 철저히 위계화함으로써 관철되는 순문학주의, 세계시장 진출 및 세계문학상에 집착하는 제국주의적 욕망 및 후진국 콤플렉스, 가족/모성애 같은 전통적 질서 수호에만 골몰하는 폐쇄적 보수성, 교조주의적 “꼰대질”…… 등으로 요약되는 이 체질들이야말로 신경숙 표절 사건 뒤에 감춰진 심각한 퇴행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젊은 독자들이 한국문학을 ‘K문학’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바로 그 ‘퇴행적 체질’의 총체를 가리킨다. ‘이야기꾼’이라는 칭호로 호출된 작가 천명관과 정유정에 대한 지배적인 비평의 흐름에서도 한국문학의 오랜 ‘욕망’은 여과 없이 드러났다. 당시 비평계는 ‘장편소설’이라는 양식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면서 두 작가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실제로 천명관과 정유정의 소설 톤과 스타일이 현격히 다른데도, 정작 그 차이는 제대로 조명되지 앟았다. 두 작가의 차이를 논해야 할 자리를 잠식해버린 ‘이야기꾼’이라는 호칭이 환기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곧 ‘남성-이야기꾼’ 모델을 중심으로 한 남성 지식인 중심의 한국문학사 전통을 자연화하려는 욕망이며, 나아가 ‘이야기의 세계’를 ‘남성의 세계’로 전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었다. 여기서 핵심은 ‘남성-이야기꾼’, ‘남성-소설가’에 대한 한국문학의 오랜 강박이 1990년대 문학과 2000년대 문학에 대한 명백한 타자화와 맞닿아 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그 욕망은 ‘1990년대 문학’과 그 후예인 ‘2000년대 문학’을 ‘여성적인 것’으로 젠더화하고, “방 한 칸에 인물 두 명만 있으면 끝나는” “한국작가들의 자기고백”으로 타자화함으로써 충족되는 것이다. 1990년대 문학과 2000년대 문학의 특성을 ‘이야기/서사 없음’으로 낙인찍는 이 방식은 “체험이란 게 학교 다녔고 연애 몇 번 했고 컴퓨터게임에 빠져본 정도의 평범한 것”이라는 식의 특정 세대에 대한 가치평가와도 긴밀히 연동한다. 한국 ‘장편 남성서사’의 신화 깨기: 누가 민주주의를 노래하는가 한국문학/비평계가 그토록 애착심을 갖는 ‘장편 남성서사’의 세계는 어떠한가? 이제는 거의 하나의 ‘장르’로 굳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편 남성서사는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한 이른바 ‘거장’ 중견 남성소설가들에 의해 생산됐다. 김훈, 이기호, 천명관 등으로 대표되는 이 중견 남성소설가들은 장편 남성서사의 양식으로 제각기 한국 근현대사를 서사화한 바 있다. 간첩조작사건이 만연한 1980년대를 다룬『차남들의 세계사』(이기호), 경제불황 이후 조직폭력배 생태계의 홍망성쇠를 1990년대 ‘조폭영화’의 문법으로 그려낸『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천명관), 일제강점기 혹은 한국전쟁기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자신과 아버지 세대의 생애사를 한국 근현대사와 등치시킨 다수의 장편소설을 펴낸 김훈까지. 이들 남성소설가의 작품이야말로 한국문학 특유의 자부심의 원천이다. 그들의 소설은 ‘개별적인 것의 진실’을 전면화한 87년 체제 이후 ‘민주화’의 결과물로, ‘가난한 자’ ‘못 배운 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와 ‘보통 사람들’의 삶을 조망해왔다. 이 남성주인공들은 계급, 학력, 인맥, 가문, 재산 등의 물질적, 상징적 자본을 소유하지 않은 하층계급 출신으로 태어나 비루하게 살아왔기에 가부장의 위치를 점하지도, 지배적 남성성을 구현하지도 못한다. 이들은 종종 역사의 파국을 경험하며, 언제나 ‘역사의 피해자’로 등장한다. 그 ‘자기 피해자화’야말로 서사를 추동하는 원리인 셈이다. 국가나 정부 같은 대문자 주체 혹은 재벌, 지식인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주류 남성서사와는 분명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만으로 충분한가? 지배층의 번영을 기원하는 우경화된 역사서사 혹은 주류 남성서사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성숙함’을 증명해주는 충분한 알리바이가 되는가? 그렇다고 보기에 이 비주류 남성 서사들은 너무나 위악적이다. 그 남성주인공들이 내세우는 ‘먹고사니즘’이 다른 한편 여성에 대한 지배와 성별분업을 자연화하고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즉 남성 주인공이 자기 자신을 폭력적인 역사에 휩쓸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먹고 자고 싸야’만 하는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로 형상화할 때, 거기에 여성의 자리는 없다. 이를테면 김훈의 소설들이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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