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엄정한 시간의 작용 앞에 사그라진 청춘과 사랑의 광휘를 소박하고 우아한 필치로 담아낸 작은 걸작 1911년 공쿠르상 후보 20세기 전반기 가장 위대한 소설 12선 1. 작품 소개 20세기 전반기 가장 위대한 소설 12선 1950년 6월 3일, 프랑스의 일간지 <피가로>는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소설 12편>의 목록을 발표했다. 콜레트, 마르셀 파뇰 등 현직 작가들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장, 문학평론가, 영화감독, 전문기자 등 문단 안팎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프랑스 현대문학의 한 빛나는 시기를 결산한 이 리스트에는 장폴 사르트르의 《구토》를 비롯하여 마르셀 프루스트의 《스완의 사랑》, 앙드레 말로의 《인간 조건》, 앙드레 지드의 《사전꾼들》 등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작품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 가운데, 리스트의 서두를 장식한 것이 바로 발레리 라르보의 1911년 작 《페르미나 마르케스》이다.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을 통해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페르미나 마르케스》는 다양한 집필 활동을 통해 프랑스 현대문학뿐만 아니라 번역 이론에 있어서도 지대한 공헌을 한 작가 발레리 라르보의 대표작이다. 당대의 철학적 인식론적 고민을 다룬 여타 작품들과 달리 다소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이 작품은, 처음으로 이성에 눈뜨고 자존감을 형성하기 시작하는 청소년기의 미묘한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내어 이후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다룬 문학이 봇물을 이루게 한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의 영향을 받아 알랭 푸르니에의 《몬 대장》이 등장했고, 그 외에도 장 콕도의 《앙팡 테리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등의 걸작들이 그 뒤를 이었다. 《몬 대장》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있게 한 20세기 청춘소설의 효시 《페르미나 마르케스》는 파리 근교에 위치한 국제적인 성격의 기숙학교 생토퀴스탱의 교정에, 두 눈 속에 “열대의 태양”을 간직한 콜롬비아 출신의 아름다운 소녀 페르미나 마르케스가 환영처럼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직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남동생을 격려하러 매일 오후 등장하는 이 아름다운 소녀는 자신도 모르는 새, “규율위반과 무례에 관해서라면 명예를 걸고 그 무엇이든 감행”하여 매타작의 대상이 되는 것도 불사하는 사내아이들에게, 그 이름만으로도 설렘과 야릇한 흥분의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된다. 이제 사내아이들 사이에서는 페르미나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경쟁이 시작되고, 작가는 이 경쟁에 뛰어든 두 명의 유망주 산토스와 레니오, 그리고 참가 자체에 의의를 두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소심하고 나이 어린 카미유, 이 세 명의 소년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어나간다. 잘생긴 용모에 우수한 성적, 거기에 소년들의 영웅심을 자극하는 일탈 행위에 있어서도 독보적인 산토스와 거친 소년들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밤마다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는 소심한 카미유가 강자와 약자, 그리고 그에 따른 위계질서로 구성되는 소년들의 세계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라면, 존재감은 없지만 오만하달 정도의 자존심과 강렬한 명예욕을 지니고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는 조아니는 누구나가 거치는 “예민한 청소년기”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애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사춘기 소년 특유의 불균형한 모습, 사랑 앞에서도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자신만의 세계와 외부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리는 그의 모습은, 어른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사진첩 한 구석에 넣어두고 있는 빛바랜 사진을 떠올리게 한다. 남에게 보이기는 민망할지언정 차마 버리지 못하는 추억의 사진 한 장, 여기에 작가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우아한 문체가 더해져 청춘, 그 자체를 문학적으로 승화한 하나의 전범이 탄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