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를 선택한 나라

벤저민 카터 헷 · Social Science/History
4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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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공화국이다.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바이마르 헌법 제1조가 규정했듯이 구(舊)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권은 분명 국민에게서 나왔다.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으며, 총선에서 비례대표제를 실행해 유권자의 민의를 보다 충실히 반영했다. 그 나라에서 최악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독일 국민에게만 책임을 묻는 건 지나치게 단순하다. 왜곡된 집단기억, 주류 정치권의 실책, 경제 위기, 반세계화·반민주 정서, 진영 갈등 등 국민이 분노하고 혼란에 빠져 제대로 판단할 수 없었던 다양한 요인이 있었다. 또한 자신들의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쉬운 선택을 한 집단들의 무분별함과, 히틀러를 ‘간판’으로 앞세워 권력을 유지하려 한 기성 정치인의 오판이 없었다면 히틀러는 결코 집권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벤저민 카터 헷 교수는 세계적으로 극우 포퓰리즘이 힘을 얻는 지금, 히틀러의 집권을 새롭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혼란했던 당시 현장을 최신 자료와 방대한 문헌을 토대로 들여다보며 바이마르 공화국에 찾아온 민주주의 붕괴 과정을 되짚는다. 마주한 현실에 분노한 사람, 이를 이용해 이득을 챙기려는 사람, 환멸과 위기감에 신음하는 사람, 그 모두의 목소리와 선택이 생생히 담긴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는 민주주의 제도와 이를 움직이는 주체들에 대한 이해를 함께 넓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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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주요 인물 및 정치 지형도 인물 소개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요 정당 서장 1장. 패전의 그림자 _강화조약과 배후중상설 2장. 히틀러의 등장 _화가에서 내란의 주모자로 3장. 피의 5월 _분열된 공화국, 드리우는 암운 4장. 세계화와 대공황 _부상하는 민족주의와 나치 5장. 흔들리는 보수 정권 _집권 우파의 위기와 내분 6장. 오만과 욕망 _정치인들의 오판과 히틀러 집권 7장. 획일화 _시작된 탄압과 ‘국민 통합’ 8장. “우리가 그를 제거해야 해” _저항, 그리고 대숙청 감사의 말 더 읽을거리 주 찾아보기

Description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이 번지는 오늘날 제3자로서, 당사자로서 살피는 민주주의 붕괴 “이렇게 대단한 문명국에서 640만 명의 유권자들이 가장 천박하고, 공허하고, 상스러운 협잡꾼을 지지했다는 사실이 무시무시하다.” 나치의 승리한 1930년 총선 직후 한 신문이 내린 평이다. 당시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은 다른 나라가 독일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 판단해 생길 외교‧금융 여파를 걱정해야 했다. 이런 유권자에게 의존하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우려한 건 물론이다. 이는 1930년대 독일만의 일인가. 미국과 프랑스와 같이 자유민주주의가 굳건해 보였던 나라에서조차 오늘날 극우 민족주의‧권위주의 등의 비민주적 가치를 앞세운 후보가 득세하고 있다. 러시아의 푸틴 역시 선거를 통해 집권하고 권위주의를 실현했다. 민주주의는 왜 민주적으로 무너질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가 히틀러가 선택한 과거와 다시 끊임없이 대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현대 민주주의를 확립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벌어진 민주주의의 죽음을 국제 정세‧법률‧정치‧경제‧사회 영역을 아우르며 분석한다. 이를 위해 독일인이 경험한 주요 사건, 정치인들의 권력 투쟁의 막후를 당대인의 발언과 시선을 따라 또렷이 펼쳐 보인다. 거시사적 관점과 미시사적 관점을 오가는 이 책에서 우리는 제3자의 눈으로 민주주의 위기를 바라보는 한편, 당사자의 입장에서 뼈아픈 반성과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답지 않은 정치, 새롭지만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기까지 “우리는 빵값이 내리기를 바라지 않는다. 빵값이 오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빵값이 변하지 않기도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민족사회주의(나치)의 빵값을 바란다.” - 피터 드러커가 기록한 어느 나치 선동가의 발언 현실적으로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를 선동가의 발언에 현장의 농민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사람들 대부분은 당시에 뭔가 정치적이지 않은 정치를 원했다. 통합과 부흥을 부르짖으며 정치와 민주주의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게 보일 수 있었다. 히틀러와 나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사람들을 설득해 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을까. 패전 원인을 둘러싼 집단기억 왜곡과 전쟁배상금 등의 전쟁 후유증은 당시 국정에 참여하는 최대 정당이자 민주주의 성향이었던 사회민주당과 민주주의 공화국에 대한 불만을 키웠다. 의회민주주의제의 바이마르공화국은 사회민주당 등의 좌파가 주도해 1차 세계대전 패전 직전 독일제국을 붕괴시킨 혁명으로 탄생한 나라였다. 패전 후에 군대 최고사령부의 핵심 인사들은 ‘당시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민주주의자들이 일으킨 내분으로 등을 찔려 패배했다’는 배후중상설을 퍼뜨렸다. 사실은 최고사령관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몇몇 장교들 역시 휴전 협상이 유일하게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점을 깨닫고 협정을 종용했었지만 말이다. 어찌됐든 민족주의자들은 민주주의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그 개념을 받아들였고, 수백만 명의 독일인들은 이를 믿었다. 자유민주주의와 이를 지지하는 정치인을 향한 환멸은 점차 가속화되었다. 전쟁배상금과 금본위제의 모습으로 찾아온 국제 질서, 무역과 경제‧난민 위기로 찾아온 세계화는 이에 분노하는 이들이 곧 자유민주주의의 적대자가 되도록 내몰았다. 민주적인 정치인들은 국제 질서에 적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었기 때문에 국제 질서와 세계화의 부정적인 여파는 곧 민주주의 정치인들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금융 위기와 세계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독일인도 고통받고 난민들이 독일로 몰려올 때 나치는 자급자족 경제론과 이민·난민 국외추방 등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하며 반세계화 정서를 토대로 성장했다. 국민은 왜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는지, 히틀러와 나치가 무엇을 약속했는지, 어떤 국민이 이에 반응했는지는 이 책을 읽으며 눈여겨볼 부분이다. 야만적인 독재정부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각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했다 최악의 패전, 증오 대상이던 강화조약과 세계 질서. 바이마르 민주주의는 위태로운 토대에서 시작되었다. 1차 세계대전 후에 찾아온 1920년대 초의 초인플레이션과 히틀러가 일으킨 내란에도 공화국은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관용과 개방성을 보이며 학문‧과학‧문화‧사상 등의 영역에서 융성한 발전을 이뤄 잠시 번창하기까지 했다. 때문에 오히려 의회 다수당인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민주주의 성향 정당의 정책에 반발하던 세력들은 민주주의의 토대를 합법적으로 뒤엎는 데 필사적이었다. 그 반민주 세력에는 민주주의자들과 대결한 민족주의자‧공산주의자 외에 대기업, 군대, 농민이 있었다. 사회민주당은 패전 후 방위비 지출에 반대하고, 임금 인상 합의를 국가가 중재하는 제도를 시행시켰다. 그렇지만 군대는 무기 구매 비용을 더 확보하고 싶었다. 대기업은 임금 중재 제도를 철폐하고 노조를 약화시키고 싶었다. 당시 독일에서 강력한 두 집단이었던 군대와 대기업은 자신들의 의제가 선거에서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권위주의에 답을 찾고 똑같은 실현 방법을 들먹였다. 사회민주당의 권력을 빼앗는 일이었다. 한편 농민들은 세계적인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인해 세금을 내지 못하거나 파산하기도 하고 있었다. 도시 노동자가 핵심 지지층이었던 사회민주당은 농민들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농산물 수입을 부추기는 무역협상으로 불붙던 증오를 부채질했다. 농산물 수입과 무역 협상이 독일 농업을 파산시킨다고 생각한 농민들은 이후 사회민주당의 적대자이자 나치를 선택한 가장 열성적인 유권자가 된다. 1930년대 초에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데에는 안정된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자신들의 욕망을 채울 수 없던 세력과, 자신들의 입장이 충분히 대표되지 못한다고 느끼는 세력의 반정부 운동이 한몫했다. 이들에 대해 저자는 “히틀러 같은 인물이 통치하는, 야만적이고 무법적인 독재정부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저 각자의 문제를 가장 쉽고 빠르게 해결하고 싶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히틀러를 총리로 내세운 기성 우파 정치인들 민주주의 제도 이면에 들끓는 권력욕과 오판 히틀러와 독일에 산재한 어지러운 문제들을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연설로 보여주며 성장했다. 1928년에 2.6% 득표했던 군소정당 나치는 히틀러가 총리가 되기 직전 해인 1932년 총선에서는 제1당이 되었다. 그렇지만 히틀러가 총리가 되는 데에는 국민의 지지뿐만 아니라 집권 우파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 프란츠 폰 파펜 등의 기성 보수 정치인들이 오판하지 않았다면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1930년대부터 이들이 대통령의 총리 임명권과 비상명령을 이용해, 의회 다수당 지도자가 아닌 자신들이 간택한 사람들을 총리로 세우며 집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던 집권 우파 정치인들은 변변찮은 세관원의 아들이었던 히틀러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모국어 문법조차 틀리고 4년간 군 복무에도 일병 진급에 그친 히틀러는 그들 눈에 국가지도자를 해낼 인물은 아니었다. 제1당인 나치가 대통령 탄핵·내란을 들먹이는데 협력할 다른 정당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면서도, 자신들이 히틀러의 선동가 재능과 추종자들을 이용하고 꼼짝 못 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1933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히틀러를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로 임명한다. 히틀러 정권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조건으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성 보수 정치인들의 오판과 오만함과 함께 출범했다. 《히틀러를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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