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존재란 도대체 무엇인가
존재에 관한 물음은 근원적인 것이다.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알고 있는가? 이것은 고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적 거인들을 사로잡았던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다. 존재 앞에서 인간은 무지의 고뇌와 사유의 희열을 동시에 느낀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길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하니 이제 그대들이 이 존재라는 표현으로 무엇을 이해하려는지 우리에게 설명해주시오. 그대들은 그 뜻하는 바에 매우 친숙해져 있을 것이고, 사실 우리 자신도 지금껏 그러하다고 믿어왔었소. 하나 지금에 와서 이렇게 당혹감에 처해있습니다.” - 플라톤, <소피스테스>
철학자 이정우는 존재에 대한 이 오래된 물음에 우리 자신이 답을 하기 이전에 지금까지 이어져온 사유의 여정을 짚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서양 존재론사는 ‘신족과 거인족’의 싸움으로 요약된다.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는 전통 존재론은 ‘신족’에, 베르그송, 하이데거, 들뢰즈, 데리다 등 니체 이후의 현대 존재론은 ‘거인족’에 빗대어 비교된다. 이들 신족과 거인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은 다름 아닌 이데아와 시뮬라크르의 대결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존재에 대한 탐구의 여정을 체계적으로 그려가면서 신족과 거인족, 곧 이데아와 시뮬라크르의 대결을 통해 서양 존재론의 핵심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또한 이 논의를 통해 시뮬라크르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21세기의 존재론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가를 사유한다.
이데아와 시뮬라크르―형상철학과 생성존재론
플라톤주의와 반(反)플라톤주의는 서양 존재론사의 두 축을 이루어 온 주된 흐름이다. 형상철학과 생성존재론은 단순한 이항대립이 아니라 매우 섬세하게 차이나는 사유들이다. 그러나 세계를 영원한 형상이 질료에 의해 ‘구현’된 것이라고 보는 플라톤적 구도와 물질의 생성을 통한 형상들의 우발적인 탄생으로 보는 니체-베르그송적 구도는 명백하게 대조된다.
먼저 제1부 이데아와 시뮬라크르에서는 존재 물음을 체계적으로 다룬 최초의 텍스트인 플라톤의『소피스테스』를 살펴본다. 이는 플라톤 사유의 전체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화편이자, 형상철학과 생성존재론, 이데아와 시뮬라크르를 사유하려는 맥락에 꼭 필요한 저작이다. 철학함 자체의 한 전범을 보여주는 중요한 저작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들과 마찬가지로 『소피스테스』에서는 로고스와 로고스가 서로 부딪치면서 흥미진진한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정우와 함께 소피스테스편을 읽어나가면서 우리는 단순화된 플라톤 상(像)을 깨고 이데아론의 보다 심층적인 모습을 들여다보게 된다.
논의는 “소피스트들이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플라톤은 사이비 지식인들인 소피스트들을 고발하려는 현실적인 문제에서 출발해 인식론을 거쳐 존재론으로까지 올라가고, 다시 인식론을 거쳐 본래의 문제로 돌아오는 논의의 원환을 완성한다. 그 과정에서 파르메니데스를 넘어서기 위해 ‘친부살해’를 감행하고, 당대까지의 존재론사를 검토하는가 하면,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을 논하기도 한다. 나아가 판단의 문제와 유들 간의 공통성, 비존재의 존재, 다섯 개의 최상위 유들, 타자로서의 비존재 같은 굵직한 문제들을 쏟아낸다.
플라톤 사유는 선별에의 의지를 깔고 있으며, 그 의지를 근거짓는 것은 이데아론이라는 존재론이다. 소피스트들이 비판받아야만 하는 이유는 진짜 진리인 이데아가 아닌 가짜인 시뮬라크르를 진리라고 말하며, 그것을 사람들에게 팔고 젊은이들을 속인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감각으로 만나는 세계가 지각할 수 있는 세계이며, 인간은 순수이성을 가지고 있어 비록 보이지 않지만 이데아계를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이데아가 존재하면 선별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플라톤 사유의 이해와 평가의 초점도 이데아론에 맞추어지게 된다.
제2부 시간, 생명, 창조에서는 니체와 베르그송을 중심으로 현대 존재론의 흐름을 짚어본다. 데카르트와 영국 경험론의 대결, 라이프니츠와 프랑스 계몽사상의 대결 등 서구의 근대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길게 이어져 온 플라톤적 사유와의 몇 차례에 걸친 격돌을 통해서 전개되어왔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의 존재론에 시선을 맞춘다면 니체와 베르그송에 이르러서야 서구 사유의 근저에서 어떤 근본적인 전환이 이루어짐을 감지할 수 있다. 니체의 출현은 플라톤주의에 의해 지배되던 서구 철학사에 새로운 지도리가 도래했음을 뜻한다. 우리는 새로운 거인족들의 존재론인 생성존재론의 거대한 발걸음을 확인하게 된다.
진리와 시뮬라크르에 대한 플라톤의 날카로운 이분법은 니체에 이르러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니체에게 모든 해석은 이 세계의 시뮬라크르이다. 어떤 이론도 세계의 핵심을 짚어낼 수 없다면 차라리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진리이다. 곧 이데아를 발견하는 것이 참이고 아닌 것은 거짓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진리라고 말하는 것이 하나의 해석/관점이 된다. 니체에게 뛰어난 이론은 우리의 역능을 고양시켜줄 수 있고 힘에의 의지를 고양시켜줄 수 있는 어떤 새로운 해석을 의미한다.
한편 베르그송은 생성존재론의 보다 확고하고 정치한 형태를 정립함으로써 현대 철학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니체와 베르그송의 존재론사 해체를 통해 비로소 시간의 의미가 현대 철학의 심장부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을 사람들은 “존재에서 생성으로”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 사유의 여진은 화이트헤드와 하이데거, 들뢰즈에까지 이어진다.
이제 ‘되기’의 실천철학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과제로 남는다. 생성존재론의 토대 위에서 실천철학의 물음을 포괄적이고 구체적으로 다루었던 대표적인 경우는 들뢰즈와 가타리이다. 저자는 ‘되기’의 실천철학은 확고하고 수준 높은 생성존재론의 바탕 위에서 구체적인 윤리학적-정치학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던 최초의 경우였다고 평한다.
새로운 존재론을 사유하다
오늘날 우리는 존재=실재보다 사유=문화의 외연이 압도적으로 큰 시대를 살고 있다. 이어지는 보론에서는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 대해 좀더 자세히 논한다. 플라톤에게 이미지/시뮬라크르는 두 가지 상이한 맥락에 닿아 있었다. 그 중 생성하는 것으로서의 이미지/시뮬라크르는 니체에 의해,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베르그송에 의해 새로운 위상을 부여받기에 이른다. 또한 모방물로서의 이미지는 오늘날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는 주제들 중 하나가 되었다. 어느 경우든 시뮬라크르는 반플라톤주의의 요람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기에 이르렀고 그 과정에서 생명과 창조의 진정한 의미가 부각될 수 있었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플라톤주의는 파기되어야 하는가? 현대는 한편으로 반(反)플라톤적 존재들인 시뮬라크르들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했으며, 그와 동시에 플라톤도 상상 못했던 형상들을 발견해내고 있다.
저자는 플라톤적 형상철학과 니체-베르그송적 생성철학의 대립을 다루지만, 우리 자신은 그런 대립을 통해 존재론의 보다 성숙한 구도가 형성된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신족과 거인족 사이에 택일해야 하는 시대가 아니라, 이들의 투쟁을 통해서 존재론의 새롭고 복잡한 구도가 형성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존재론을 구축할 수 있는가? 21세기의 존재론은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