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고민상담소

전봉관 ·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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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기담>의 저자 전봉관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고민'과 '사랑'이다. 저자는 이 두 가지 키워드를 풀어내기 위해 1930년대 신문 독자상담 코너에 주목했다. '남녀 문제, 가정 문제, 어찌하리까?'라는 표제 아래, 그 시절 사람들을 잠 못 이루게 했던 뜨거운 고민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근대와 전근대가 착종하던 1930년대는 '성 윤리의 아노미 시대'라 할 만큼 혼란했고, 마마보이, 폭력 남편, 바람둥이 등이 그 틈을 비집고 기승을 부렸다. 이 책은 뜨거웠던 청춘의 고민 속으로 걸어 들어가 당대 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분석하고, 근대인들의 일그러진 일상을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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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머리말 1장 조혼이라는 감옥 1. 꼬마 신랑 꼬마 신부 2. 학자까지 대 주며 뒷바라지했건만 3. 모두가 불행한 선택, 조혼 경성 스케치 - 그녀들의 마지막 선택: 살인, 방화, 자살 2장 제2부인의 탄생 1. 남편의 이혼만 기다립니다 2. 신여성의 결혼난과 제2부인을 향한 시선 3. 기혼 청년들의 항변 경성 스케치 - 춘원 이광수와 그의 두 아내 3장 바람난 가족 1. 남자의 사랑은 무죄? 2. 참고 또 참아도 3. 아내, 반란을 일으키다 경성 스케치 - “외도를 하면 배우자에게 더 충실할 수 있다.” 4장 여성 수난사 1. 고부 갈등의 탄생 2. 매 맞는 아내 3.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할지니 경성 스케치 - 미신과 사교(邪敎) 5장 과도기의 성 1. 전근대 성 윤리의 그림자 2. 정조 윤리의 해체 3. 관계하고 나니 재미가 적어 4. 어느 미혼모의 고백 경성 스케치 - 여학생이라면 동성애 한 번쯤은 6장 금지된 사랑 1. 이혼녀, 연상녀, 과부 2. 사랑과 우정 사이 3. 이중 연애, 누구와 살아야 할까요? 경성 스케치 - “전남편의 정충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맺음말 주

Description

1930년대판 「마녀사냥」, 그 시절 청춘들의 뜨거운 고민이 되살아나다 『경성기담』의 저자 전봉관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고민’과 ‘사랑’이다. 저자는 이 두 가지 키워드를 풀어내기 위해 1930년대 신문 독자상담 코너에 주목했다. ‘남녀 문제, 가정 문제, 어찌하리까?’라는 표제 아래, 그 시절 사람들을 잠 못 이루게 했던 뜨거운 고민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근대와 전근대가 착종하던 1930년대는 ‘성 윤리의 아노미 시대’라 할 만큼 혼란했고, 마마보이, 폭력 남편, 바람둥이 등이 그 틈을 비집고 기승을 부렸다. 이 책은 뜨거웠던 청춘의 고민 속으로 걸어 들어가 당대 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분석하고, 근대인들의 일그러진 일상을 추적한다. ■ 왜 근대의 사생활인가? 근대와 전근대가 착종하던 1930년대는 ‘성 윤리의 아노미 시대’라 할 만큼 혼란했다. 자유연애의 도입으로 이제 막 사랑에 눈뜬 근대인들은 전근대 가족 윤리와 끓어오르는 연애 감정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잦은 폭력으로 병상에 누운 아내를 강제 퇴원시키고 그 돈으로 오입질하는 남편, 처제를 임신시키고도 자살하라 명하는 뻔뻔한 형부, 관계하고 나니 재미가 적어졌다며 약혼을 해소하려 드는 파렴치한이 판치는 시대가 탄생한 것이다. 우리는 왜 이 혼란의 시대에 주목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이때, 지금 우리의 사생활을 규정하는 가족 문화와 성 윤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수백 년간 이어졌던 조혼의 병폐가 공론화되고,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의 해법으로 이혼이 제시되었으며, 양육비나 위자료 같은 개념이 생겨난 것도 이즈음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가혹한 시집살이와 고부 갈등은 지금도 수많은 가정불화의 주요 원인이고, 성차별적인 정조 관념 역시 잔존해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아직도 사회구조적 모순이 낳은 성 문제, 가정 문제로 고민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문학자 특유의 날 선 통찰력으로 개인의 사적인 고민 뒤에 숨은 사회구조적 모순들을 짚어 낸다. 저자는 1930년대 남성들의 성적 방종, 제2부인 문제, 가정 폭력의 기저에 조혼 풍습, 뿌리 깊은 정조 관념, 남성의 간통죄를 규정하지 않는 법 규정 문제 등이 얽혀 있었음을 확인하고, 길항하는 가치들의 충돌이 개인들의 삶을 어떻게 비극으로 몰아갔는지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 성폭행 당한 여성은 간통녀? 아내가 강간당했다. 여자 혼자 집에 있는 것을 알고 침입한 괴한의 소행이다. 아내는 있는 힘껏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동네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아내의 행동도 미심쩍어 재차 물었더니 사정을 털어놓았다. 일반적인 남편이라면 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내를 지키지 못한 자책감과 성폭행범에 대한 분노에 힘들어 하며, 우선 아내의 상처를 보듬으려 노력하지 않았을까? 그런 후 개인적으로든 경찰의 힘을 빌려서든 범인을 찾아 처벌하려 했으리라. 하지만 1930년대 남성들은 달랐다. 그들은 아내를 간통녀로 몰고, 집에서 나가라고 악다구니 쳤다. 심지어는 간음한 여성과는 살 수 없으니 재혼 비용을 대라고 억지를 부렸다. 그러면서도 성폭행범을 찾는 데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성범죄가 면식범의 소행임을 고려할 때, 아마도 범인이 남편과 아는 사람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당시 남성들이 이토록 어이없게 행동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들이 강간과 간통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무지해서일까? 무지가 원인은 아니다. 남편이 아닌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맺은 여성은 이유를 불문하고 간통녀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대의 상식’이었다. 당대 최고 엘리트이자, 진보 인사였던 변호사 신태악 역시 그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남의 처가 되어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였다 하는 것은 법률상으로 보든 도덕상으로 보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임은 물론이지만 당신의 처가 한 번 실수로 그와 같이 실행한 뒤 지금 와서는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고 당신에게 그처럼 전후사를 자백한 뒤 다시는 그런 비행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이상 이제 구태여 지나간 일을 들추어 문제를 삼는 것은 당신을 위해서든 당신 처를 위해서든 하지 않을 일인가 합니다. (197~198쪽) 근대 교육을 받은 변호사조차 강간과 간통을 구분하지 못하던 시대였다. 자유연애와 여성 권리에 대한 인식이 싹트고 있었으나 정조에 집착하는 전근대 성 윤리가 훨씬 뿌리 깊었다. 이 때문에 여성들은 성폭행을 당하고도 위로받기는커녕 그보다 훨씬 가혹한 2차 피해에 시달렸지만, 남성들은 방종에 가까운 성적 자유를 누렸다. ■ 남자를 만나 정조를 잃느니 차라리 동성연애를 하려무나! 이성과의 만남보다 동성애가 더 자유로웠다? 이성 간의 연애는 당연시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떨치지 못한 현대인들에게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1930년대에 상황이 이러했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자유연애의 확산으로 연애에 대한 갈망은 커졌지만, 뿌리 깊은 정조 관념 때문에 이성과의 만남에 제약이 따랐기 때문이다. 근대 교육이 시작되면서 한창 나이의 학생들이 한 공간에 모여 단체 생활을 하게 된 것도 동성애 확산에 기여했다. 게다가 당시에는 남녀공학보다 여학교, 남학교의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 이 시기 동성애 붐이 얼마나 대대적이었는지, 신문 기자, 산부인과 의사 등 내로라하는 여성 명사들이 잡지 지면에 자신의 동성애 경험을 털어놓았을 정도였다. 여학생 시절에 동성연애를 안 해 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나 역시 여러 차례 경험해 보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도 더러 있지요. (252쪽) 열네다섯 살 때 진명여학교를 다니면서 동성연애를 많이 했습니다. 남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많았을 걸요! (253쪽) 기성세대가 동성애에 관대했던 것은 그들의 만남이 ‘정조의 파괴’라는 물리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기성세대는 학생들의 동성애를 동기간의 우정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당시의 동성애는 정신적인 사랑뿐 아니라 육체적인 사랑도 동반하는 것이었다. 아래 글은 당시 동성애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는 나를 마치 여성처럼 받아 주었습니다. 그는 내가 손을 만지고, 껴안고, 뺨을 대고, 키스를 해도 다 가만히 받아 주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둘 다 남성이면서도 꿀 같은 연애 생활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256쪽) 이처럼 1930년대 한국은 이성애보다 동성애에 더 개방적인 특이한 현상을 보였다. 자유연애 풍습을 받아들이면서도 봉건적 정조 윤리를 고집한 결과였다. 그 같은 괴리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효과를 내기도 했지만, 대개 수많은 청춘들을 고민에 빠뜨렸다. ■ 아이까지 낳고 보니 남편은 부인 있는 사나이 금년 21세의 여자올시다. 이미 남의 아내 된 지 4년, 또한 자식이 둘씩이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남편에게는 멀쩡한 본처와 자식이 오 남매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안 저는 참 기가 막힙니다. 이제 와서 아니 살자니 천덕구니 자식 볼 생각에 불쌍해 못 견디겠고, 서로 헤어지기는 매우 곤란한데 세상에 이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선생님, 아니 살아야 옳을까요, 그대로 살아야 할까요? (66쪽) 위 내용은 「어찌하리까」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사연 가운데 하나다. 결혼하고 보니 남편에게 본처와 자식들이 줄줄이 달렸더라는 제2부인들의 절절한 신세 한탄 말이다. 실제로 1930년대에는 한 남성이 둘 이상의 아내와 사는 일이 흔했다. 물론 식민지 조선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엄격한 일부일처제 국가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