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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글 불과 글, 신비와 서사는 문학이 포기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어떻게 한 요소의 실체가 다른 요소의 상실을 반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증명하고 부재를 증언하면서 그것의 그림자와 추억을 필연적으로 상기시키는가? 글이 있는 곳에 불은 꺼져 있고 신비가 있는 곳에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관료주의적 신비 죄와 벌의 신비는 언어의 신비와 일치한다. 인간이 감수하는 벌뿐만 아니라 4만 년 전부터(즉 인간이 말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인간을 상대로 끊임없이 진행되어온 재판은 사실 말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가 곧 형벌이다. 언어 속으로 모든 것들이 돌아가야 하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죄의 분량에 따라 쇠해야 한다. 비유와 왕국 우리가 언어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말들의 의미, 말들의 모든 모호함과 미묘함을 파악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세상과 왕국의 근접성과 유사성을 깨닫는 일이며, 하늘 나라가 우리의 눈으로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세상과 너무 가깝고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창조 행위란 무엇인가? 모든 사물이 스스로의 존재 속에 보존되기를 욕망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사물은 동시에 이러한 욕망에 저항하며 짧은 순간이나마 욕망을 무위적으로 만들고 관조한다. 관건이 되는 것은 여전히 욕망에 내재하는 저항력, 노동에 내재하는 무위다. 무위만이 예술의 품격을 부여할 수 있다. 소용돌이 액체가, 다시 말해 존재가 취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형상은 물방울과 소용돌이다. 물방울은 액체가 스스로에게서 떨어져 나와 황홀경에 빠지는 지점에서 발생한다(물은 떨어지거나 흩어지면서 물방울로 분리된다). 소용돌이는 액체가 스스로를 향해 집중되는 지점, 회전을 통해 자신의 바닥으로 내려가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무엇의 이름으로? 부재하는 무언가의 이름으로 말을 한다거나 침묵한다는 것은 하나의 요구를 경험하고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수한 형태의 요구는 항상 어떤 부재하는 이름의 요구와 일치한다. 거꾸로 부재하는 이름은 우리에게 그것의 이름으로 이야기할 것을 요구한다. 요구가 요구하는 것은 사실 어떤 현실이 아니라 무언가의 가능성이다. 이집트에서의 유월절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절기를 이집트에서 보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파울(페자흐) 첼란의 경우, 그가 시를 써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와 그의 시적 과제가 안고 있는 불가능성에 대해 수차례에 걸쳐 이야기한 모든 내용이, 이집트에서의 유월절과 관련지어 검토될 때 특별한 방식으로 빛을 발한다. 글 읽기의 어려움에 관하여 독서가 불가능한 글쓰기가 있는 반면 글쓰기가 없는 독서가 있다. 이 두 가지 경우가 모두 사실 우리에게 굉장히 유사하다. 즉 독서와 글쓰기가 서로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 자체를 뒤흔드는 독특한 독서와 글쓰기의 경험을 우리는 필요로 한다. 책에서 화면으로, 책의 이전과 이후 생각한다는 것은 글을 쓰거나 읽는 동안 백색 페이지를 떠올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질료를 기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컴퓨터 사용자는 ‘화면’이라는 이 물리적인 장애물, 이 형태 없는 것이 그에게 끝내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남기 때문에 발생하는 비물질적인 성격에 대한 관념의 허구를 중성화할 줄 알아야 한다. 창작 활동으로서의 연금술 시적인 삶의 형태란 작품 속에서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스스로의 잠재력을 관조하고 그 안에서 평화를 찾는 삶일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은 오로지 작품의 무위적인 상태에 의해서만, 즉 어떤 작품을 통해 하나의 순수한 잠재력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스스로를 삶의 형태로 구축하는 방식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옮긴이의 말_불과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