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 ‘공고’도 (공고)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공고 이야기 “꼴통, 공돌이 학교, 양아치 우글거리는 곳.” “이왕 교사를 할 거면 인문계로 가야지 웬 공고냐?” “어머, 어떡해요. 거기, 정말 힘들죠?” “여기서 일할 수 있겠나? 어쩌다 여기까지 왔노?” 공고 선생 지한구는 날선 말들로 ‘공고’를 강조하거나, 공고를 묵음인 양 감추려는 시선을 매일 공기처럼 만난다. 친한 친구는 “이왕 교사를 할 거면 인문계로 가야지 웬 공고냐?”며 타박 아닌 타박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분”이라고 운을 뗀다.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공고’는 언제나 삭제되고 숨겨진다. 교사 집단도 마찬가지여서, 공고에서 근무한다고 하면 다들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한다. “어머, 어떡해요. 거기, 정말 힘들죠?” 힘들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적극 동조하면 자신의 일터와 제자들을 폄훼하게 될지도 모르는 난감한 상황이 거듭될수록 교사로서의 자존감은 점점 낮아진다. 교사조차도 이런 일을 비일비재하게 겪는 사회에서, 공고생들은 어떤 대접을 받으며 살아갈까. 고등학교 3학년을 마치면 대학 입학 대신 취업을 하는 학생들을 위해, 때때로 공고 교사는 취업처를 확보하려 전국 곳곳을 누비는 ‘영업 사원’이 된다. 공단을 돌아다니다 크고 깔끔하다 싶은 공장이 보이면 일단 밀고 들어가 취업 담당자를 만났다. 종일 회사 수십 곳을 찾아다니며 “우리 공고생 좀 받아 달라.”며 사정하지만, 문전박대만 당한 채 ‘취업 승낙서’ 한 장 못 받은 날도 부지기수다. “선생님, 걱정하지 마시소. 애한테 무슨 큰일이라도 시키겠습니까? 여기 계신 어르신들이랑 치킨 박스 좀 만들고 하면 됩니더. 육십 넘은 노인들도 다 하는 일이니 잘할 겁니대이.” 첫 담임을 맡아 처음으로 취업을 보낸 제자 우현(가명)을 공장에 직접 바래다주고 싶었다. 페인트 공인 아버지가 현장에 갈 때 쓰는 승합차에 태워 데려간 공장에서 우현이가 맡은 일은 3미터 넘게 쌓인 치킨 포장 상자를 접는 일이었다. 그대로 두고 올 엄두가 나지 않아서, 선생 지한구는 페인트 냄새 가득한 운전석에 앉아 한참을 고민한다. 이러려고 학교는 3년간 그 노력을 했던 걸까? 지금이라도 우현이에게 돌아가자고 할까? ‘노가다’로 삶을 일군 아버지에게 자랑이었던 ‘화이트칼라’ 교사 아들이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을, 자신조차 납득할 수 없는 노동 현장에 떨구고 있다는 걸 알면 아버지는 계속 나를 자랑스러워할까? “꿈과 희망을 가르치는 초중고 12년의 끝이 대개 비정규직이라는 현실이 허망하고 슬플 뿐이다. 공장에서 종일 치킨 박스를 접어도 안정적인 삶을 꾸릴 수 있고, 그런 노동도 존중받는 세상이 오면, 나는 학교에서 당당하게 꿈과 희망을 학생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 그런 세상은 멀어 보이고 여름은 정점으로 달려가고 있다. 여름이 끝나면 공고 3학년 교실은 텅 비어 간다. 아이들은 공장으로, 식당 주방으로, 배달 현장으로 흩어진다.” ● 공고 이야기,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우리 시대 학교 이야기 성적순으로 소수의 학생이 특목고, 자율고와 영재고에 지원하고, 대다수의 학생은 대개 ‘일반고’라 일컫는 인문계고 진학을 결정한다. 해마다 차이가 있지만, 중학교 성적 80퍼센트 안쪽 아이들이 인문계고에 진학하고 그 외 학생들이 공업고등학교 등 특성화 고교에 들어온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자신만의 간절한 꿈을 이루겠다며 특성화고에 오는 학생은 거의 없다. 취업에 나가서 죽거나 손가락 몇 개 잘렸을 때만 눈길 한 번 겨우 받아 보는 이 시대 공고생들은 어떤 꿈과 좌절, 웃음과 눈물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2011년 기간제 교사 시절부터 줄곧 공고에서 근무한 저자는, 다른 학교였다면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일을 여러 번 겪었다고, 공고에 오지 않았다면 평생 마주칠 일이 있을까 싶은 아이들을 참 많이 만났다고 말한다. 기초 생활 수급자와 한부모 가정 출신 등 가정 형편이 어려워 일찍부터 돈을 벌어야 하는 아이들, 중학생 시절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인문계 고교에 진학하지 못해 스스로를 ‘실패자’로 여기는 아이들, 각종 사건 사고에 연루됐거나 게임에 빠져 학교생활 자체를 힘겨워하는 일명 문제아까지. 아이들은 밤에 일하느라 낮에 학교에 와서는 엎드려 있거나, 어떻게든 좋은 성적을 받아 인문계 고교로 전학할 방법을 찾기도 하고, 무기력하게 지내다 끝내 자퇴하기도 한다. 공부에 집중하기 어렵고, 학창 시절을 마냥 즐기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 보니, 자퇴나 퇴학 등으로 학교를 떠나는 아이가 40명을 넘긴 해도 있다. 네 명이 아닌 40명. “교사 지망생 시절, 국어 선생이 되면 아이들과 윤동주의 「서시」를 읊을 거라 여겼다. 내가 순진했다. 나는 한국의 교육 현실과 고교생의 삶과 공고의 높은 자퇴율을 몰랐다. 학교에서 헬스 트레이너 역할을 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학교를 떠나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는 게 무섭고 슬펐던 저자는 이런 학생들에게 다가가 돕기 위해 온갖 방법을 궁리한다. 벌점 60점을 초과해 곧 퇴학을 통보받을 ‘고위험 학생’을 기필코 졸업시키겠다며 달라붙거나, 이주 배경만큼은 숨기고 싶다는 베트남 출신 학생을 위해 국어 과목 기초학력 진단 평가를 통과시키려고 함께 벼락치기 공부에 돌입한다. 아이들이 학습 영상에 흥미를 갖게 하고자 음악 방송 대기실을 찾아가 아이유에게 부탁해 응원 멘트를 녹화해 오기도 한다. 심지어 전에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헬스부 지도 교사가 되어 학생들과 함께 피트니스 대회에 출전해 입상하고 지역 라디오방송에까지 출연한다. 그렇게 함께 땀 흘리며 웃고 울던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 학교를 떠난다. 외고, 과학고, 자사고의 ‘자랑스러운 선배’는 의사·변호사·판검사일지 모르지만, 저자가 일하는 공고에서 성공한 선배는 대개 자영업 사장님이다. 저자를 비롯한 교직원들에겐 공통의 징크스가 있다. 외식을 하거나 밖에서 술을 마시면 꼭 재학생이나 졸업생을 한 명 이상 만난다는 것. 맛집으로 소개받고 갔는데 사장님이 학교 출신이거나, 맥주 한잔 마시러 간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 중인 옛 제자를 만나는 식이다. 배달 라이더 노동자가 고개 한 번 숙이고 쌩하게 달려간다면 십중팔구 졸업생이고, 집에만 있는 날에도 가정 방문 택배 기사, 가스 검침원, 전자 제품 수리 기사가 된 아이들을 곧잘 만난다. 한때 제자였던 학생들은 어느덧 서로의 삶을 지탱하고 지켜 주는 이웃이 된다. 우리에게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인재도 필요하지만, 머리를 다듬어 주고 인터넷이 고장 나면 빛의 속도로 달려와 나를 세상과 연결해 주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을 키우는 학교, 그곳이 바로 저자가 일하는 공업고등학교라고 이야기하는 이 책을 읽다 보면 문득 깨닫게 된다. 꿈 없이 입학했던 학생들도 저마다 크고 작은 꿈을 꾼다는 사실을, 그리고 평생 마주칠 일이 있을까 싶은 아이들이 알고 보면 나의 일상을 지켜 주는 가까운 이웃이라는 사실을. “누군가는 공고에서 어떻게 가르치느냐고 염려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지난 10여 년간 ‘지방 8학군’을 오가며, 나의 제자들에게 많은 걸 배웠다. 이 책이 내가 누군가를 가르친 흔적이 아닌, 공고에서 보고 배운 증거로 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