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우리를 벗어나, 우리의 바깥에서,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활보하는 기억의 풍경 김미령 시집 『제너레이션』이 민음의 시 333번으로 출간되었다.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해 시집 『파도의 새로운 양상』, 『우리가 동시에 여기 있다는 소문』을 선보인 김미령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김미령의 시에서 기억은 무한한 탐험의 공간이다. 그리하여 시간은 그 모험의 시작과 끝을 그려 나갈 지도가 된다. 두 번째 시집 『우리가 동시에 여기 있다는 소문』을 통해 ‘찰나’에 깃든 무한의 풍경을 열어, ‘나’에게 깃든 무수한 타인을 우리에게 펼쳐 보여 주었던 김미령 시인은 이번 시집 『제너레이션』에서는 말 그대로 ‘세대’라는 거대한 단위의 시간을 지도로 삼는다. ‘세대’는 아이가 어른이 되는 ‘약 30년 정도의 시간’, ‘공통의 시간과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 혹은 그 시대 자체’를 말한다. 한눈에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시간 속에서 기억은 하나하나 개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삶이라는 시간을 촘촘히 살아내는 ‘생활자’인 동시에 그 시간을 벗어나 삶을 조망하는 ‘관찰자’이기도 한 것처럼, 기억 또한 그렇게 존재한다. 한순간 한순간인 동시에, 그 순간들이 모두 엮인 풍경 전체로 공존한다. 『제너레이션』이 그리는 시대, 세대, 혹은 시절이라 명명할 거대한 시간 속에서 기억은 한순간 ‘나’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나의 바깥에서,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바라보고 활보한다. ‘나’를 벗어나 자유로워진 기억은 홀로 걷고, 앉아 있고, 박수를 치며 웃고, 무언가를 골똘히 응시한다. 숲속에 모여 춤추고 노래하는 유령들처럼 우글우글한 모양으로 서로 뒤섞인다. 그로 인해 『제너레이션』에서의 기억은 정물 같은 한 장의 사진이 아니라 광활하고도 생생히 살아 있는 풍경이 된다. 이 풍경은 이수명 시인의 말처럼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 기억의 산물” 그 자체다. 우리는 그것을 구경한다. 기억의 바깥에서 구경꾼이자 타자가 되어. ■ 시간의 마디 당신 없는 당신 자리에 당신의 기억이 나 없는 자리에 내 기억이 앉아 있고 그 기억은 우리에게 거주하지 못하고 어디를 맴도는지 ― 「당신의 기억이 나에게 옮아와서」에서 우리가 세대를 명명하는 방식과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든 것이 지나고 나서야 말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이전 세대가 저물고, 새로운 세대가 한창 무르익고 나서야 새 세대에 대한 명명이 가능해지듯 기억 또한 그렇다. 한 시절이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그때에 대해, 그때 우리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제너레이션』에서의 기억은 사건의 안쪽이 아닌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그곳에서 기억은 한 사람이 살아생전 경험할 수 없을 먼 시간과 자유롭게 연결된다. 서로 다른 세대, 시절, 순간 들이 연결되는 곳에 시간의 경계가 만들어진다. 『제너레이션』 속 시간의 경계들은 마치 제각각 형태와 모양이 다른 ‘마디’ 같다. 식물이 새로운 가지를 뻗을 때 생겨나는 접점, 비워진 듯 느슨하게 이어진 뼈와 뼈 사이의 작은 공간 같은. 이와 같은 시간의 틈새를 기억들이 분주히 오간다. 바로 그곳이 김미령의 시가 시작되는 장소, 사건이 일어나는 ‘현재’다. 다른 시간이 뒤죽박죽 끼어드는 『제너레이션』의 현재는 미래보다 모호하고 과거보다 혼란스럽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미묘한 자유로움으로 넘실댄다. 그 매혹적인 물결 위를 우리는 마음껏 표류한다. 우리의 의지를 벗어난 기억이 제멋대로 나아가는 방향대로, 아슬아슬한 즐거움과 기대감을 안고. ■ 네 개의 제너레이션 그러니까 이건 이제부터 새로 시작되는 이야기지만 낯익은 이야기이고 그도 모르게 그에게 전해지던 유구한 슬픔이자 언제나 닿고 싶었지만 끝내 이르지 못한 그 자신 안의 흐릿한 풍경인지도 모른다고 ― 「제너레이션」에서 네 개의 부로 구성된 『제너레이션』에는 각 부마다 한 편씩 동명의 시가 실려 있다. 이 네 편의 「제너레이션」은 마치 지도 위에 표시해 둔 힌트처럼 이 시집 속 풍경들을 느슨히 이어 준다. 첫 번째 「제너레이션」은 이제 막 죽어 멈춘 삶이 이야기가 되어 가는 신비로운 장면을 그린다. ‘그’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일별한 기억들은 마침내 그를 떠나 “제 갈 길”로 흩어진다. 두 번째 「제너레이션」의 화자는 과거의 모습을 모두 잃어버린 옛 동네에서 희미하게 번뜩이며 고요히 생동하는 과거의 풍경을 마주하고, 세 번째에 이르면 지금의 21세기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매혹적인 20세기 풍경이 펼쳐진다. 마지막 네 번째 「제너레이션」의 화자는 지금 살아 있는 우리 중 누구도 절대 경험하지 못할 머나먼 과거를 목격하고, 마치 그 시대를 살아 본 듯 이야기한다. 거듭 과거로 거슬러 오르며 펼쳐지는 이 네 개의 ‘제너레이션’이 보여 주는 것은 기억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움직이고, 누군가에게 닿아 제 기억처럼 스미는 신비로운 여정 그 자체다. 우리에게는 문득 솟아오르는 생각, 누구에게도 배운 적 없는 낯선 감정, 시시때때로 우리를 멈춰 세우는 생경한 기분으로 느껴지는 것들. 이를테면 우리가 모르는 새 우리에게 전해진 “유구한 슬픔”의 기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