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전시, 현대미술의 방아쇠가 되다 『현대미술의 결정적 순간들』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분기마다 결정적 역할을 한 전시들을 소개한다. 이때 단순히 이런 일이 있었다고 소개하는 수준을 넘어 그 사건의 주인공들이 빠져든 고뇌, 맞닥뜨린 사건, 성공과 실패, 전후 맥락과 미술사적 영향력을 고루 다룬다. ① 야수주의, 입체주의 처음으로 현대미술이 등장하는 무대는 프랑스 파리였다. 당시 파리는 여러모로 미술의 중심이라 할 만했다. 18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서구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시회로 군림한 관전살롱이 열리고 있었고 미술에 대한 파리 시민들의 관심도 굉장했다. 왕립 관전 살롱은 8주간 50만 명에 달하는 관람객이 방문할 정도였다. 비록 주류는 아니었지만 이런 기름진 토양에 현대미술도 점차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현대미술이 단번에 호응을 끌어낸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관객이 현대미술의 서막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현대미술 작가들은 마치 선전포고를 하듯 전시회를 개최하고 작품을 소개했다. 대표적으로 야수주의의 《살롱 도톤》과 입체주의(Cubism)의 《앙데팡당》이다. 특히 야수주의는 사조의 이름 자체를 전시에서 얻었다. 1905년의 제3회 《살롱 도톤》에서 그들의 작품을 처음 본 평론가들이 “야수들”이라고 평가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마티스, 블라맹크, 드랭 등의 회화는 정말 야수처럼 강렬하고 공격적인 색채와 파격적인 표현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특히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이 큰 화제가 되었다. “스타인은 풍부한 형상언어가 진부한 주제를 신선하고 새롭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알아봤고, 독창적 표현방식에 감탄했다. 그녀가 문학가로서 고심하던 부분과 일정 부분 상통하는 면이 있었고, 스타인은 〈모자를 쓴 여인〉에서 가공하지 않은 강렬한 여성성의 표현에 주목했다. 이는 다른 그림들처럼 감미롭고 감상적인 처리가 아닌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_ 32쪽 야수주의가 《살롱 도톤》에서 그랬던 것처럼, 입체주의 역시 《앙데팡당》에서 이름을 얻었다. 1911년 열린 《앙데팡당》은 “열광적인 사건”이었다. 많은 이가 이 충격적인 전시를 보러 왔다. 당시 《앙데팡당》은 심사위원 없이 자유분방하게 작품을 전시했는데, 그래서인지 대부분 관람객이나 비평가는 굉장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행히도 같은 해 10월 열린 《살롱 도톤》에서 입체주의는 체계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다. 물론 《살롱 도톤》의 심사위원들도 입체주의에 부정적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정식적으로 평가받은 데 의의가 있다. 피카소가 1907년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발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입체주의가 처음 소개된 것은 이보다 앞선 일이지만 ‘이즘’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1911년의 《앙데팡당》과 《살롱 도톤》에서였다. 전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② 표현주의, 다다, 초현실주의 야수주의와 입체주의가 파리에서 현대미술의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독일에서는 표현주의가 등장했다. 다리파, 청기사파가 주축이 된 표현주의는 프랑스 현대미술에 영향받으면서도 “정신성의 깊이와 내면세계의 충동”이라는 독일적인 정체성을 점차 강하게 띠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반전의식과 패배주의 등이 결합해 신즉물주의로 이어진다. 다리파는 키르히너, 놀데 등이 활동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아웃사이더’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스스로 전시 장소를 모색했다. 개인화상, 후원자 등을 찾아 발품을 팔았고 1907년부터 3년간 드레스덴의 개인 갤러리들에서 전시를 열 수 있었다. 대규모 전시가 아니다 보니 아담한 공간에서 단순한 액자에 넣은 그림을 가깝게 볼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세련된 전시 스타일이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르주아 관람객을 대상으로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청기사파는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주도로 창립되었다. 그들의 첫 전시는 1911년 탄하우저 갤러리에서 열렸는데, 작가 14명의 작품 43점이 전시되었다. 규모가 큰 건 둘째 치고 애초에 “‘청기사파’라는 동질적 그룹의 작업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전시 동선도 복잡하게 구성해 관람객이든 평론가든 후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청기사파가 ‘이즘’으로 정립된 것은 1년 뒤인 1912년 『청기사 연감』을 출간하면서부터다. 그들은 이 책을 “‘내적 필연성’을 드러내는 자신의 작품을 대중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글’이라는 사회적 방편”으로 활용했다. 한편 스위스에서는 다다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인 1916년 스위스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의 암울한 사회상을 반영해 기존 체제와 전통적 미학을 반대했다. ‘다다’라는 명칭 자체가 사전을 펼치고 칼을 꽂아 우연히 걸린 단어다. 정체성이 이러하다 보니 체계적인 조직을 갖춰 활동하기보다 여러 도시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했다. 시작은 스위스 취리히였고 베를린, 쾰른, 하노버, 파리를 지나 뉴욕까지 확산된다. 다다의 스타는 누가 뭐래도 뒤샹일 것이다. 프랑스에서 살롱 큐비스트로 활동하던 뒤샹은 1915년 뉴욕으로 건너온 후부터 회화를 접고 레디메이드 작품에 집중한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샘〉이다. 뒤샹의 〈샘〉이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력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제대로 소개되지조차 못할 뻔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몇 명이나 될까? 뒤샹은 이 작품을 ‘R.MUTT’라는 가명으로 1917년 뉴욕에서 열린 《앙데팡당》에 제출했다. 집행부는 이 작품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작품을 거부할 수 없다는 《앙데팡당》의 규칙상 반려하지 못하고 대신 칸막이벽 뒤에 숨겨놓았다. 이를 안 뒤샹이 작품을 찾아 모두가 보란 듯이 당당히 들고나왔다. 이후 스티글리츠에게 〈샘〉의 사진을 찍도록 했고, 그 사진은 『맹인』 제2호에 실렸다. “무트 씨의 〈샘〉은 비도덕적이 아니라 부조리하다. 욕조보다 더 비도덕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철물점 쇼윈도에서 매일 볼 수 있는 가구류다. 무트 씨가 샘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느냐 안 만들었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그가 일상생활의 평범한 오브제를 취하여 그것의 일상적 의미가 사라지도록 배치했다. 새로운 제목과 새로운 관점을 통하여 그는 그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창안해낸 것이다.” _ 146쪽 다다만큼이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이 바로 초현실주의다. 1938년 파리에서 열린 《초현실주의 국제전》에서 미술사적 의미를 획득한 초현실주의는 1942년에 뉴욕에서 열린 《금세기 미술》과 《초현실주의 제1차 서류전》에서 절정을 맞았다. 《초현실주의 국제전》에서 단연 주목받은 것은 달리의 〈비 오는 택시〉였다. 갤러리 로비에 설치된 이 작품은 관람객에게 문을 지나 다시 밖으로 나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내부와 외부의 반전이라는 공간구성은 그 자체로 파격이었다. 초현실주의의 실용적인 면이 주목받은 것도 이 전시의 특징이다. 전시에서 선보인 가구 디자인, 의복 패션 등이 상류층을 중심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이렇듯 파리의 《초현실주의 국제전》은 초현실주의의 독자적 미학을 넘어 미술 전반에 발상의 전환과 창작의 단초를 제시했다.” 뉴욕에서의 아방가르드 전시는 아트딜러 구겐하임의 역할이 지대했다. 구겐하임은 1942년 《금세기 미술전》을 마련할 때 건축가 키슬러를 고용하여 파격적인 전시공간을 만들었다. 키슬러는 관람객과 작품 사이의 장애물을 없애고 “인간적 견지”에서 관람할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했다. 작품을 절대 만져선 안 되는 전시가 아니라 건드려도 보고, 앉아서 쉬어도 보는 전시가 탄생한 것이다. “이것은 구겐하임의 신념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③ 추상미술 추상미술은 모던아트의 꽃이라 불릴 만하다. 20세기 전반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이후 다양한 추상미술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는 1960년대 포스트모던 아트가 도래하기 전까지 활발히 현대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