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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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있어서 ‘한 번’이란, 정말로 오직 ‘단 한 번’의 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순간에서 ‘한번은’으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탄생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을 잇는 빔 벤더스의 ‘한번은’ 빔 벤더스(Wim Wenders). 독일 전후 세계를 상징하는 대표적 감독. 영화 아카데미가 배출한 최초의 감독.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 혹은 메이저 영화의 기류에 휩쓸리지 않고 현재까지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굳건히 지키면서도 세계적인 명성을 잃지 않는 영화계의 거장.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빔 벤더스이다. 그는 또한 성실하고 열정적인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그가 영화를 만들기 이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사진작업에 몰두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영화계에서 그의 명성이 워낙 크기도 하지만, 그 스스로도 영화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큰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빔 벤더스는 「파리, 텍사스」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후에야 자신의 사진을 인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곱 살 때 처음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열두 살 때 자신만의 암실을 만들었으며 열일곱 살에 아버지에게서 라이카 카메라를 선물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사진작가의 꿈을 꾼 적은 없다. 사진은 자신의 일부이지 직업이 아니라고 여겼다고 한다. 영화감독 중에는 빔 벤더스가 한 인터뷰에서 언급한대로, 알렝 레네(Alain Resnais, 「히로시마 내 사랑」을 만든 프랑스 영화감독)나 크리스 마르케(Chris Marker, 「태양없이」를 만든 시네마 베리테 계열의 프랑스 영화감독)처럼 자신들의 영화의 스틸 컷을 지속적으로 찍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빔 벤더스 역시 그런 감독 부류에 속한다. 그의 사진은 영화의 정지화면 같기도 하며, 그는 촬영 현장을 스틸 컷으로 직접 기록한다. 영화 작업을 위해 장소 헌팅을 갈 때에도 늘 카메라와 함께 한다. 여기까지는 사진을 좋아하는 보통의 영화감독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가 특별한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진에 대한 자신만의 이론을 발화했기 때문이며, 사실은 발화하기 이전에 이미 그의 사진이 스스로 특별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사진을 찍을 때, 결정적인 순간(decisive moment)을 직관적으로 포착해야 함을 이야기했다. 이는 그의 사진 미학을 대표하는 말이자, 많은 포토그래퍼들이 공감하며 감탄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빔 벤더스 역시, 사진이 담는 찰나의 순간과 ‘단 한 번’(einmal=only one moment) 존재하는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브레송의 ‘직관’이 빔 벤더스에게는 ‘장소와 사물의 외침’이다. 그는 자신이 찍어야 할 어떤 순간이 만들어지길 기다리거나, 특정한 장소와 사물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 로드무비를 향한 그의 취향은 사진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지도를 펼쳐놓고 마음에 드는 장소로 간다. 그리고 그 장소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그는 카메라에 어떤 것을 담기 전에, 장소나 사물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하는지에 먼저 귀를 기울인다고 한다. 그는 ‘장소와 그 장소에 존재했던 사물들의 외침과 이야기’를 찍는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의 사진 속 장소와 사물들은 특별한 빛을 내뿜는다. 그의 사진에서 초점과 구도를 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찍은 사진들은 초점이 나간 것들도 있고, 좀더 완벽한 구도에서 사물을 담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의 사진은 결코 어느 영화감독의 아마추어 사진놀이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장소와 사물의 외침’을 성실하게 듣고, 자신만의 관점으로 성실하게 카메라에 담았기에, 마침내 우리는 사진 속 ‘장소와 사물의 진심어린 이야기’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사진은 오직 빔 벤더스만이 포착할 수 있는 장소와 사물들이다. 그가 사진에 담은 장소와 사물은 그때 한 번 마주쳤을 뿐이고, 또 단 한 번의 슈팅으로 오직 한 컷으로 남지만, 빔 벤더스는 사실 장소와 사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기에, ‘한 번'은 ‘한번은'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로 새롭게 태어난다. 빔 벤더스는 평생 수많은 사진을 찍고, 여러 권의 사진집을 출간했다. 그 중에서 이 책, 『한번은,』은 빔 벤더스 사진 철학의 정수가 담긴 유일한 책이며,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재빠른 이미지』(미국판 제목은 결정적 순간이다) 비견되는 사진 미학의 바이블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의 사진에서 ‘한번은’의 가치를 더욱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는 그의 직업, 즉 그가 ‘영화감독’이라는 데 있다. 이 책에는 빔 벤더스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20세기 최고의 감독과 영화배우들이 등장한다. 그들과의 우연한 만남은 우선 놀랍다. 미국 대륙을 횡단하다 마틴 스콜세지와 이사벨라 로셀리니를 만나질 않나, 화장실에서는 「열정의 제국」의 감독 오시마 나기사와 마주치기도 한다. 그는 매우 간결한 문체로 이 책에 실린 사진에 ‘한번은’으로 시작하는 글을 붙였다. 그럼에도 그가 동료 감독과 배우에게 느끼는 존경심과 애정은 숨겨지지 않는다. [빔 벤더스의 사진 세계] 1. 장소와 사물들의 외침 “내가 사진 찍기를 통해 어떤 장소를 발견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그 장소들이 날 불렀어요.” - 「아메리칸 포토」 2001년 11.12월호 2. ‘한 번’의 순간은 ‘한번은’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만든다 ‘빔 벤더스는 사진에는 몽타주가 부재한다는 사실이야 말로 사진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한다. 영화와 달리 단 한 장만으로, 그 자체만으로 의미를 갖는 사진의 속성을 그는 “한 번(einmal)”으로 정의했고, 그는 이 용어에 몰입했다. 그러나 영화감독인 그는 사진과 사진 사이에 존재하는 스토리를 놓치지 않았고, 그럴 때 사진이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는 사실에 흥미를 가졌다고 한다.’ -「영국 사진 저널」2011년 5월 17일자 3. 부서진 것들은 말한다 빔 벤더스가 유독 장소와 사물에 끌린다는 건, 그의 사진 속에 건물, 나무, 바다, 비행기, 세계 여러 나라의 풍경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 장소와 사물들은 ‘완벽한 상태’에서 ‘온전한 모습’일 때는 빔 벤더스를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언제나 ‘부러진 상태’거나, ‘폐업 직전의 영화관’이라던가, ‘버려진 무덤’들만 그를 부른다. 빔 벤더스는 이렇게 말한다. “‘온전한 전부’보다 ‘부서진 것들’이야 말로 많은 기억을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부서진 것들’의 외관은 불안정하죠. 그렇기에 누군가의 기억을 꼭 붙들어 맵니다. 깨끗한 외관을 가진 온전한 것들의 표면에서 우리의 기억은 미끄러져 나갈 뿐입니다.” - [원스] 전시 서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