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 : 화재경보

미카엘 뢰비
2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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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재경보기’ 발터 벤야민이 들려주는 해방의 역사철학 | “어떤 의미에서 벤야민의 저작 전체가 자신의 동시대인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화재경보’라고 간주될 수 있다. 동시대인들을 위협하는 임박한 위험에 대해, 지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새로운 파국에 대해 주의를 끌어당기려고 애쓰는 화재경보 말이다.” 국내에 발터 벤야민 선집이 소개되기 시작한 지도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 뒤로 국내 연구자들의 벤야민 연구서가 6권 가량 나왔지만, 벤야민은 여전히 충분히 이해되지 못한 사상가 중의 하나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벤야민 특유의 비의적(秘儀的)이고 압축된 사유 때문일 텐데, 벤야민의 사상적 ‘유언’이라 불리며 지금도 수없이 인용되는 논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도서출판 난장의 신간 『발터 벤야민: 화재경보』(미카엘 뢰비 지음)는 혁명적 사상에서 칼 맑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1845) 이후 가장 의미심장한 문서이자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정치적 텍스트 중 하나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통해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보여주는 역작이다. 흔히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기이한 이미지, 알레고리, 계시, 역설이 곳곳에 있으며, 번뜩이는 직관들이 가로지르는 신비한 텍스트로 여겨져왔다. 그래서인지 기존의 연구들은 벤야민의 수수께끼 같은 구절을 그에 못지않은 어려운 표현들로 바꿔 쓰곤 했다. 이와 달리 뢰비는 벤야민이라는 텍스트=숲의 나무들 사이에서 독자들을 헤매게 만들기보다는 이 숲 전체를 위에서 조망할 수 있는 명쾌한 시각을 제시한다. 뢰비의 결론에 따르면,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한마디로 해방을 위한 혁명적 비관론이다. 이것은 “역사는 원래 그렇게 진행될 것이[었]다”(즉 “그러니 우리는 역사를 바꿀 수 없[었]다”)라는 ‘멜랑콜리한 숙명론’=‘역사주의’에도, “진보는 불가피하게 승리할 것이다”(혹은 “대중의 지지는 보장되어 있다”)라는 좌파의 ‘낙관론적 숙명론’=‘진보주의’에도 반대한다. 오히려 역사는 어떤 의미로든 미리 정해져 있기보다는 무한히 열려 있는 무엇이다. 그러므로 이 열림 속에서 역사의 다른 가능성들, 즉 해방적이고/이거나 유토피아적인 가능성들을 찾아나가는 것이 관건이다.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이를 위한 일종의 참조점이다. 동시대인들에게 임박한 위험과 파국(파시즘의 도래, 진보주의의 파산)을 알려줬던 ‘화재경보기’ 벤야민. 벤야민이 울린 그 화재경보는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 이뤄진 지금 이곳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각성시켜주는 바가 있다. 역사의 이 새로운 열림 속에서 우리는 역사를, 더 나아가 우리의 삶 자체를 해방의 방향으로 향하게 할 수 있을까 없을까? 그 성패는 온전히 우리의 선택(=내기)에 달려 있을 것이다. |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 “벤야민의 역사 개념은 포스트모던하지 않다. 벤야민의 역사 개념은 해방의 서사의 비정통적 형태를 이루고 있다. 메시아적·맑스주의적 원천들에서 영감을 받은 벤야민의 역사 개념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현재를 비판하는 혁명적 방법으로 활용한다.” 미카엘 뢰비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해석하는 데 성공하려면 그 텍스트를 벤야민이 쓴 일련의 저작 안에 위치시켜야 한다고 본다. 벤야민이 전개한 사유의 운동 안에서 그 텍스트를 준비하거나 예고하는 계기들을 탐지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뢰비는 이런 과정을 통해 벤야민의 역사철학이 매우 상이한 세 가지 원천, 즉 독일 낭만주의, 유대 메시아주의, 맑스주의를 참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다른 연구자들도 이 점을 언급해왔다. 그러나 뢰비의 독창성은, 벤야민이 양립 불가능한 이 세 관점을 절충해 ‘조합’하거나 ‘종합’하지 않았다고 보는 데 있다. 오히려 벤야민은 이 세 관점에서 출발해 극도로 독창적인 새로운 개념을 발명해내는 ‘시적 사유’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가 그 단어의 모든 의미에서 ‘분류 불가능’한 사상가, 텍스트가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시에 뢰비는 벤야민의 지적·정치적 삶을 전환시키고 단절시킨 다양한 만남(게르숌 숄렘, 프란츠 로젠츠바이크, 베르톨트 브레히트)과 당대의 사건(파시즘의 도래,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등) 안에도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위치시킨다. 가령 복고적 보수주의가 아니라 혁명의 이름으로 ‘진보주의’를 공격하는 맑스주의자,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으면서도 미래를 꿈꾸는 유물론의 지지자라는 벤야민의 독특한 위치는 이런 ‘외부’와의 부딪힘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뢰비의 주장이다. 벤야민이 쓴 일련의 저작, 당대의 지적·정치적 맥락에 뒤이어 뢰비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과거’의 텍스트를 ‘현재’라는 맥락 안에 한 번 더 재/위치시킨다. 가장 많은 몰이해와 난감함을 낳은 벤야민의 테제, 즉 ‘유물론과 신학의 연합’이라는 이념(테제 1번)을 설명하기 위해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 신학을 살펴본다거나, 산업적/자본주의적 문명의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 개념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테제 15번)을 설명하기 위해 1994년의 사파티스타 봉기나 2000년 당시 브라질 발견 500주년의 공식 기념 시계를 향해 화살을 날린 바 있던 젊은 원주민들의 에피소드를 끌어오는 것이 좋은 예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뢰비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의 모든 테제들을 한 줄 한 줄 곱씹는다. 하나의 테제를 다른 테제와의 논리적 연관성 아래에서 명쾌하고 설득력 있게 읽어가며 테제 모두를 소개한 연구서는 국내외를 통틀어 전혀 없다. 이런 점에서 뢰비의 이 책은 우리가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들을 ‘이해’하고 ‘인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사고를 촉발할 수 있는 도약대가 되어준다. 또한 뢰비는 그동안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의 ‘정본’으로 통용되어온 구(舊)전집의 판본만이 아니라 기존의 다양한 영어 판본들과 프랑스어 판본들, 특히 벤야민이 손수 번역한 테제의 프랑스어판을 꾸준히 참조하고 있다(본서에 부록으로 수록). 이런 시도는 프랑스의 벤야민 연구 수준을 보여준다는 의미말고도,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의 주요 이본들을 제한적으로나마 비교·검토해봤다는 의미가 있다. 물론 본격적인 비교 연구는 아직 국내외를 통틀어 이뤄진 바 없다. 그러나 그 준비 작업의 일환으로, 옮긴이 양창렬은 총 7개의 핵심 이본들을 정리하고 있다(「옮긴이 후기」 참조). 사실 때이른 죽음 탓에 벤야민 자신이 ‘권위를 부여한’ 정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차라리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증식하는 이본들을 통해 우리의 맥락에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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