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그 누구도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서양예술사! ‘학자는 저술로서 평가받아야 한다’라는 신념으로 미디어를 통한 모든 활동을 거부하고 오직 저술을 통해서만 독자를 만나 온 조중걸 교수가 새롭게 정리한 총 다섯 권의 「서양예술사; 형이상학적 해명」 중에 <현대예술> 편에 이어 <근대예술> 편이 출간되었다. 그가 쓴 서양예술사는 이제껏 그 누구도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것으로서 구석기 시대 예술에서부터 고대와 중세와 근대의 예술을 거쳐 현대예술에 이르는 인류의 장엄한 성취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명이다. 이번 <근대예술> 편은 예술양식의 흐름으로 구분하여 르네상스부터 매너리즘,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까지를 담고 있다. 역사를 일관하여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그토록 많은 혼란과 다양한 양식을 가진 시기는 없다. 전시대가 아직 고·중세의 유산 가운데 과거의 일부를 보존하고 있었지만 18세기 후반부터는 과거와 완전히 결별한다. 이 시기는 이미 현대를 예고한다. 새롭게 대두된 인식론적 경험론은 회의주의와 유물론을 불러들인다. 편집 과정에서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각각의 양식에 내재한 철학적 토대가 우리 시대와 매우 가까이 있다는 느낌이었다. 근대 후기 속에 이미 현대는 잉태되어 있었다. 저자의 전작 과 근대 후기 편은 긴밀하게 연결된다. 저자는 로코코에서 후기인상주의까지의 여섯 개의 양식을 동시대의 과학과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간결하면서도 풍부하게 설명해 나간다. 거기에 과학사, 철학사, 예술사는 존재해왔다. 그러나 이것들 모두가 구조적으로 얽혀있다는 사실을, 그것이 어떻게 얽혀있는가의 사실을 밝힌 저술은 없었다. 역작이다.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양식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명은 여태까지 불가능했다. 누구도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것을 원했을까? 저자는 말한다. “나는 원했었다.” 하나의 예술양식은 하나의 세계관과 맺어진다! 뵐플린은 미술가와 작품들에 대한 설명과 분석이 주가 되던 기존의 전통적인 도상학에서 벗어나 양식에 의해 전개되는 미술사를 최초로 시도한 양식사가이다. 그러한 혁신적인 시도로 인해 우리는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각각의 양식으로 구분하여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예술사의 커다란 사건이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과 바로크 시대의 작품들의 각 양식으로서의 존재의의는 무엇인가? 그러한 각각의 양식적 특징들이 생기게 된 것은 왜일까? 당시의 예술가들에게 그러한 양식이 호소력이 있었던 동기는 무엇인가? 이것이 심미적 안목을 갖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던 이유는 무엇인가?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과 문학에서도 동일한 성격의 양식이 도입된 동기는 무엇인가? 저자는 ‘하나의 예술양식은 하나의 세계관’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하여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포착하려는 새로운 시도와 탐구로 밀고 들어간다. 이 책은 따라서 양식의 이해를 위해서는 세계관의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부분에까지 밀고 들어가야 한다는 이념에 기초해 있고 또 그 이념이 책의 핵심을 이루며 실현되어 있다. 이러한 측면에 있어 이 저술은 예술에 대한 지적이해의 유례없는 성취이다. 모든 예술사가는 그에게서 배워야 한다! 시리즈 중 제일 먼저 <현대예술> 편이 출간된 이후로 우리 출판사는 여러 통의 격려와 문의 전화를 받았다. 가장 많이 들은 격려와 칭찬의 말은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기분이다’, ‘읽고 나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런 책을 출간해줘서 고맙다’였다. 우리는 독자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 똑같았으니까. 저자의 원고를 받아들고 최초의 독자로서 고양된 지적 흥분 속에서 잠 못 이룬 날들의 연속이었다. 가장 많이 들은 문의 내용은 ‘왜 이 정도로 뛰어난 국내 저술이 제대로 소개가 되지 않느냐’, ‘저자는 어떻게 이 책을 쓰게 되었느냐’, ‘다음 책은 언제 출간되느냐’였다. 책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만큼 저자에 대한 궁금증도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늘 출간에 즈음하여 출판사에 저술과 관련한 소회를 간단히 밝히는 서한을 보내온다. 이번 <근대예술> 편의 출간을 앞두고도 출판사에 이메일 한 통을 보내왔다. 짧은 서한에서도 그의 간결하고 순수한 문체와 표현은 정말 아름답다. 세밀하고 날카로운 통찰이 빛을 발하는 저술과는 다른 느낌이어서 독자에게 소개가 되는 것을 저자는 우려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 서한의 내용이 독자들이 이번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에, 그리고 한편으로 저자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이 작게나마 해소되길 바라며 전문을 싣는다. 예술양식이 형이상학적으로 해명 가능하고 또 해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가 30여 년간 이 작업에 몰두한 이유였습니다. 누구도 예술양식의 형이상학적 해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술양식이 그러한 해명을 입지 않는다면 도상학도 양식사도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양식은 이를테면 하나의 “그림 형식(pictorial form)”입니다. 그 양식에 속한 예술가는 세계를 달리 묘사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이상한 낯섦을 주는 중세의 세밀화도 당시 수도원의 사제들에게는 익숙한 세계였습니다. 그것 이상이었습니다. 그것들은 익숙한 것을 넘어 그들 삶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삶을 살 수도 없었고 다른 눈으로 세계를 볼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하나의 양식은 하나의 세계관의 심미적 형식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계관”입니다. 양식을 결정짓는 세계관은 결국 같은 양식의 형이상학이 이해되어야 해명됩니다. 어떤 현대 예술가도 르네상스 양식의 예술을 도입하고자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양식이 아니며 우리 시대의 철학적 이념에 기초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거 예술의 이해는 그 시대의 형이상학의 이해를 전제합니다. 물론 누구도 과거에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사람들에게 방법론적 공감을 해야 합니다. 어느 시대가 다른 시대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는 단지 병치되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삶의 이해는 모든 시대를 한 바퀴 돌고 와서야 가능합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모든 역사는 현대사입니다. 이 책은 그러한 시도의 소산입니다. 예술사가 단지 작품의 분석에 지나지 않는 것, 동일한 양식임을 분석에 의해 이해하는 것 ― 이것이 모든 예술사라는 사실이 저를 불만족스러운 초조감 속에 밀어 넣었습니다. 우리는 물론 예술에 대한 지적 이해 없이도 그것을 즐기고 거기에 감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러나 “천성적으로 알고자” 합니다. 르네상스양식은 전체로서 어떤 세계관 위에 준하는가, 로코코 양식은 그 향락적 형식하에서도 어떻게 감상자를 행복하게 하는가 등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제게는 선결문제였습니다. <근대예술> 편은 특히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아홉 개의 양식이 복잡한 이념적 교체하에 어지럽게 얽혀 나갑니다. 각각의 양식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명은 제게 거의 반평생에 이르는 시간을 요구했습니다. 출판에 즈음하여 자기연민과 감상에 빠지려 합니다. 이것은 경계해온 것입니다. 이것들은 충족감 속에서 안일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자기만족으로 밀고 갑니다.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은 수사일 뿐입니다. 30년은 길었고 저술은 힘겨웠습니다. 고중세가 남았다는 사실이 부담입니다. 지나친 행복은 행복만은 아닙니다. 행복 가운데 탈진된다는 사실을 모를 뿐입니다. 조증 환자가 울증으로 고통받듯이 들뜬 탐구자가 탈진으로 고통받습니다. 무엇도 할 수 없을 거 같은 의기소침은 제게 새로운 것이고 그 두려움 또한 새로운 것입니다. 어떤 것들이 떠오릅니다.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젊은이가 루브르와 바티칸을 드나듭니다. 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