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날카로운 유머로 집 안을 꿰매는 가정부 미스 몰,
자기 연민을 허락하지 않는 자리에 채워 넣는 자존감에 대하여
그간 문학사에서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은 ‘가정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1930년대의 유쾌한 고전.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을 수상한 E. H 영의 대표작. 작가도 작품도 국내 첫 소개. 20년 동안 가정교사나 노부인들의 동반자로 살아오며 불안정하게 생계를 유지해온 가정부 ‘미스 몰’이 ‘로버트 코더’ 목사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코더 집안사람들의 변덕과 기질에 휘둘리면서도 자기 주도성을 잃지 않는 미스 몰이 유리 조각처럼 흩뿌려놓은 사랑, 위트, 속삭임, 상상력……. 이를 그러모아 모자이크 작품을 만들어가는 독자는 어느덧 자기연민을 허락하지 않는 미스 몰에게 푹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 집의 가정부, 간병인, 가정교사, 도우미……
아니, 구원자 미스 몰!
20년간 가정부나 노부인들의 동반자로 살아가며 불안정하게 생계를 유지하는 미스 몰. 마흔 살이 된 그는 자신을 고용한 노부인과 문제가 생겨 그곳에서 나올 위기에 처하고, 우연히 부유한 친척이자 친구인 ‘릴라’를 만나 로버트 코더 목사 집안의 가정부로 고용된다. 거기에는 답답하고 가부장적인 코더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은근히 그를 닮은 큰딸 ‘에설’, 여전히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작은딸 ‘루스’, 그리고 의대에 다니는 건방진 조카 ‘윌프리드’가 살고 있다.
미스 몰은 “혼란에 빠진 한 젊은 여자와 (……) 언제라도 기절할 것처럼 보이는 어린아이가 살고 있는 집에 상황을 지휘할 수 있는” 자신이 있다는 것에 힘을 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 가족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혼잣말하며 가족의 혼란 속으로 휩쓸린다. 그럼에도 미스 몰은 서서히 에설과 루스, 그리고 윌프리드의 마음을 얻고 “좀처럼 웃지 않는” 코더를 가끔 웃게 한다. 고용인이라고 해서 고분고분하게만 대하지 않고 할 말은 반드시 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필그림’이라는 이름을 듣자 어떤 상황에서도 웃으려 노력하던 미스 몰의 얼굴이 굳어버린다. 필그림과 함께 미스 몰의 과거에 대한 소문이 코더 집안사람들에게 퍼지고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지도 모르는 비밀이 그녀를 서서히 덮쳐오는데…….
“나라면 당신의 도금된 새장에 갇혀 지내느니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면서 생계를 꾸려가겠어요.”(218쪽)
“이럴 수가, 웃기고 똑똑한데
친절하기까지 한 여자!”
일생에 걸쳐 다양한 상황에서 함께 살아가지만 얼핏 주목하기 힘든 ‘가정부’, ‘간병인’, ‘가정교사’, ‘도우미’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가정부인 미스 몰은 1930년대 소설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캐릭터다. 물론 오늘날에도 상황은 비슷하지만 말이다. 미스 몰은 예쁘지도 순진하지도 좋은 배경을 갖고 있지도 않다. 사람들은 그를 어김없이 ‘노처녀’라 부르거나 ‘부적응자(misfit)’라는 의미로 ‘미스 피트’라 부른다.
하지만 미스 몰은 거짓과는 다른 허구를 무기로 삼아 이런 현실을 세련되게 돌파해나간다. 고용주에게 굽신거리지 않으며 자신의 신념을 웬만해서는 굽히지 않는다. 존중 어린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여성에게 적절한 행동이 무엇인지 규범이 존재했지만 자발적인 해고를 택할 정도로 세간의 평가를 의식하지 않는다. 때로 압박감을 느낄 때도 허구의 사촌 ‘힐다’의 이야기를 꺼내 화제를 돌리는 등 상상의 마술로 곤경을 빠져나간다.
미스 몰의 기지와 삶을 대하는 느긋한 태도를 천천히 따라가다보면 김멜라 소설가의 추천사처럼 “‘아, 웃긴 여자’, ‘아아, 웃기고 똑똑한 여자’, ‘이럴 수가, 웃기고 똑똑한데 친절하기까지 한 여자!’”라고 자연스럽게 말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웃음거리가 될 사람이 아니었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고, 겁을 먹지도 않을 것이었다!(77쪽)
하지만 영은 가정부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동시에 모든 위기를 허구와 상상의 마술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스 몰은 끝없는 외로움에 허덕이며 자기 효능감을 증명하기 위해 싸운다. 고요하게 쉴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이 없고, 성격과 감정을 숨겨야 하며 모두의 필요를 맞추다보니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 그림자”로서 살아간다. 마흔 살이 되었고 노화가 두렵다. 미스 몰이 돌보는 그 누구도 “그녀가 잠들거나 깬 채로 꿈을 꾸고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미스 몰은 많은 사람을 돌보지만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코더 목사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트렁크가 든 “수레를 따라 걸으면서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고 자신이 유일한 애도자”라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장 공포스러운 상황에서도 웃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야”라고 말하는 미스 몰은 자기 연민에 오래 빠져 있지 않는다. 비록 장밋빛 현실은 없지만(“강요된 운명에서 실패작이었던 그녀는 자신이 선택하는 다른 운명에서도 성공작일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희망을 놓지 않고(“기회를 붙잡지 않는 건 미련한 마음이죠”), 자신이 직면해야 하는 과거는 무슨 수를 쓰든 비껴갈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직면한다. 자신을 우습게 만들려는 소문을 걷어내고, 자신을 휩쓸어버리려는 사람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는 용기와 함께.
세상을 홀로 항해하는 작은 배들을 응원하는
E. H. 영의 재미와 아이러니에 대한 감각
《미스 몰》은 발표된 그해에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을 받았고, 1930년 한 해에만 6쇄를 찍는 등 ‘젊은 고전’으로 빠르게 자리매김했다. 동생이자 라디오 성우였던 글래디스 영은 《미스 몰》을 포함한 영의 몇 작품을 BBC 라디오 방송에서 낭독했고, 일부는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영의 작품들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자신의 기호에는 맞지 않았다며, 바로 그런 이유에서 영이 훌륭한 작가인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비라고 출판사의 창립자 카먼 칼릴은 “영에게 돋보이는 점은 조용한 아이러니와 강렬함, 그리고 제인 오스틴으로 시작되는 영국 여성 작가 전통이다”라면서 영의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으며, ‘비라고 모던 클래식’에 영의 작품 여덟 권을 포함하기도 했다. 《데일리 메일》은 《미스 몰》을 두고 “사랑, 외로움, 위트를 활용한 1930년대의 이 유쾌한 고전은 시대를 훨씬 앞서 있다”라고 평했다. 거의 100여 년 만에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E. H. 영과 《미스 몰》은 자기 삶에 있어 “자신이 유일한 애도자”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러나 “가장 공포스러운 상황에서도 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슬픔과 희망과 환희를 가져다줄 것이다.
《미스 몰》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여성의 삶과 역할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여성들은 소외된 채였다. 돈이 없거나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 구할 수 있는 일자리가 거의 없었고, 나이 든 독신 여성을 향한 낙인도 여전했다. 영은 여성참정권 운동의 적극적인 지지자로서 이런 현실을 날카로운 통찰로 되짚으며 100여 년의 세월을 넘어 “사람들은 여자들이 의리 없다고 그러잖아! 아, 나는 벌써, (……) 그 부인의 자매가 된 기분인데!”라고 외친다.
해나는 “스스로 종종 자신을 홀로 용감하게 항해하는 병에 든 작은 배에 비유”했다. 정연희 번역가가 해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말한 것처럼 “병에 든 작은 배처럼 이 세상을 홀로 용감하게 항해하는 모든 이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