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사티는 자신의 독백을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작은 소리로 스스로에게 말을 건다.” - 마르셀 슈네데르(프랑스 음악평론가) 짐노페디, 그노시엔느, 배 모양을 한 세 곡의 소품……음악의 역사에서 독자적 광채를 내뿜는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의 작품에는 갖가지 해석이 뒤따랐다. 여러 미디어가 혼합된 작품의 밑바탕에는 전통적 미학에 대한 삐딱한 도전적인 태도가 깔려 있다. 사티는 풍자와 해학을 즐겼다. 이런 그의 면모는 작품 제목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관료적인 소나티네’ ‘차가운 소곡집’ ‘엉성한 진짜 변주곡-개(犬)를 위하여’ ‘말의 옷차림으로’ ‘바싹 마른 태아(胎兒)’ ‘배(梨) 모양을 한 세 개의 곡’ ‘지나가 버린 한때’ 등 서로 모순되는 의미의 두 단어를 합쳐 놓거나 전혀 이미지가 연결되지 않는 단어를 합쳐 놓은 기묘한 제목은 듣는 사람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물론 그 속에 담긴 속뜻이 무엇일까 유추하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사티는 선천적인 반골 기질의 소유자였다. 학창 시절부터 아카데믹한 음악에 반감을 품은 사티는 생계를 위해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정통파들은 “음악의 격을 떨어뜨린다”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사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양한 패러디를 통해 고급 음악의 권위를 살짝 비트는 것을 즐겼다. 고전주의 작곡가 클레멘티의 소나티네 작품 36의 1번을 패러디한 《관료적인 소나티네》처럼 말이다. 외형적으로는 고전주의 소나타 형식을 따른 듯 보이는 《관료적인 소나티네》는 곳곳에 이를 살짝 비튼 풍자와 해학이 숨어 있다. 그중에서도 3악장의 ‘Vivace(빠르게)’를 ‘Vivache’로 표기한 부분이 압권이다. ‘vache’는 프랑스어로 ‘소[牛]’를 말한다. 빠르고 경쾌한 리듬을 지시하는 이탈리아어 ‘비바체’를 느릿느릿 여유롭게 움직이는 ‘소’를 의미하는 프랑스어로 바꾸어 놓은 사티만의 언어 유희인 셈이다. ‘음악계의 이단아’ 사티는 언어의 곡예사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글은 그의 음악만큼 기이하기 짝이 없다. 인쇄 매체가 발달한 근대 이래로 많은 작곡가는 오선지를 잠시 물린 채 문장으로 자신들의 음악적 이념을 설파하고, 과거 또는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비평하며, 교육적·학문적 저술을 내놓았다. 그중에서도 세기 전환기의 파리에서 세간의 몰이해 속에서 기상천외한 유머와 아이러니, 풍자와 역설을 늘어놓은 ‘권외 작곡가’ 에릭 사티의 존재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티는 왜 썼을까. 사티를 둘러싼 맥락은 무엇이며, 기이한 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일본의 음악학자 시이나 료스케는 그 자체로 대단히 독특한 사티의 작품과 그의 뜻 모를 말들을 ‘사티의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성공했다. 사티의 언어의 맥락과 배경을 꼼꼼히 살펴보고, 사티의 (숨은) 의도를 파헤치기 위해 사티에 관한 ‘거의 모든’ 자료를 발굴하고 답사에 나선 그의 집념 덕분에 우리는 ‘사티’라는 텍스트(가사, 대본, 칼럼, 에세이, 강연문, 편지, 메모)에 감춰진 ‘비밀’과 ‘비의’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에릭 사티, 이것은 음악이 아니다』를 통해서 말이다. * 에릭 사티는 누구인가? 프랑스 대혁명에서 파리 코뮌에 이르는 80여 년의 정치적 격변 이후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에 활동했던 아방가르드 작곡가. 1866년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지방 옹플뢰르에서 해운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반항적이었고 농담을 즐겼다. 1879년 파리음악원에 입학했으나 아카데믹한 분위기에 염증을 느껴 중퇴했다. 26세의 청년 사티는 쉬잔 발 라동과 6개월간 짧은 사랑을 나누었다. 1887년 몽마르트르에 정착하고 나서는 개성적 차림새를 하고 알퐁스 도데, 기 드 모파상, 에밀 졸라, 샤를 구노, 클로드 드뷔시 등 파리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카페 ‘검은 고양이(Le chat noir)’의 피아니스트로 일하며 이름을 날렸다. 똑같은 모양의 검은 벨벳 슈트 열두 벌을 돌려 입고, 백여 개의 우산을 갖고 있었지만 정작 비가 오는 날에는 젖는다는 이유로 접고 다녔으며, 1인 종교의 사제이자 유일한 신자로 산 기인이었다. 사티는 시대를 앞선 ‘음악 발명가’였다. ‘안단테’ ‘모데라토’ ‘알레그로’ 등을 적어야 할 악보의 지시어 자리에 “치통을 앓는 나이팅게일처럼” “너무 많이 먹지 말 것” “난 담배가 없네” “매우 기름지게” “혀끝으로” “구멍을 파듯이”라고 썼다. 같은 악구를 무려 840번 반복하는 곡 《짜증》을 완성하고 나서는 “이 곡을 제대로 연주하려면 아주 조용한 곳에 꼼짝 말고 앉아서 미리 단단히 연습해두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1963년 존 케이지와 열한 명의 피아니스트들은 이 곡을 15시간 연주하며 사티의 지시를 따랐다. 어디 음악뿐이랴. 사티는 수많은 그림과 글을 남겼고, 우스꽝스러운 강연과 분노에 찬 외침으로 세상에 맞섰다. 사티에게 희망은 클로드 드뷔시였다. 드뷔시 스스로 ‘서정극’이라 이름 붙인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사티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1903년, 드뷔시는 사티에게 ‘형식’을 공부하도록 권했고, 사티는 《배 모양을 한 세 곡의 소품》으로 화답했다. 파리음악원을 졸업하지 못한 열등감 때문이었을까, 드뷔시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걸까. 사티는 39세였던 1905년 가을, 뱅상 댕디가 교장으로 있던 파리의 사립 음악학교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하여 대위법과 음악 이론을 공부하고 1908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학업을 마친 사티 곁에는 라벨과 콕토가 있었다. 두 사람은 사티에게 연주를 알선해주고, 곡의 출간을 도왔으며, 살롱을 드나드는 사티를 차에 태워줬다. 드뷔시는 처음에는 그를 존경했지만 나중에는 배척했고, 라벨은 그를 지지했으며, 콕토는 그를 우상화했다. 사티의 음악은 ‘침묵’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침묵 이전에 온 것과 이후에 올 것을 작곡했다. 1888년, 사티는 라투르의 시 「고미술품」에서 영감을 얻어 《짐노페디》를 작곡했다. 《짐노페디》는 부드럽고 매혹적인 선율의 왈츠 곡으로, 고전적인 피아노 음악을 뒤엎었다. 1890년에는 조표와 세로줄을 폐지한 《그노시엔》을 작곡했다. 이 밖에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영감을 얻은 《소크라테스》, ‘가구처럼 그저 그 자리에 있는 음악’이라는 뜻의 ‘가구 음악’도 사티가 우리에게 남긴 선물이다. 1898년 12월, 사티는 파리 남쪽 교외의 아르퀴유로 떠났다. 아르퀴유 코시가 22번지, 다섯 평 남짓한 집, 수도도 전기도 없는 모기가 득실거리는 그곳에서 알코올중독, 간경화, 늑막염으로 고생하면서도 아동 복지를 위해 힘쓰고, 밤에는 몽마르트르의 카바레에서 일하며 수많은 샹송을 작곡했다. 1925년 7월 6일, 그의 장례식 날에는 날씨가 아주 화창했고, 장례 행렬은 매우 길었다. 향년 5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