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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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21세기 세계의 군사적 단층은 9개의 핵무장국과 184개의 비핵국으로 나누어져 있다. 핵무기의 확산과 핵전쟁 우려를 종식하기 위해 1970년에 출범한 핵비확산조약체제는 5대 국가(미국‧소련‧영국‧프랑스‧중국)의 핵보유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을 금지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핵비확산(NPT: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체제가 출범한 이후 핵국과 비핵국 사이에는 핵확산 방지와 핵확산 시도라는 국제정치적 게임이 전개되었다. 그런 중에도 세계의 189개국이 NPT 회원국이 되었고, 그 규범을 받아들이고 있으나,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북한이 NPT체제의 밖에서 핵무기를 개발하여 NPT의 도전요소가 되고 있다. NPT가 보편적 국제체제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한국은 1970년에 NPT에 가입하고 1975년에 NPT를 발효시켜 모범적인 비핵국으로 행동하여 왔고, 핵의 군사적 측면을 완전히 배제하고 전력생산을 통해 광명의 빛을 주는 평화적 측면의 원자력발전을 일으켜서 세계 5위의 원자력발전국가에 진입하였다. 반면에 북한은 1985년에 NPT에 가입하고도 2003년에 NPT를 탈퇴하고, 군사적 측면의 핵무기 개발에만 올인하여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되었다고 선포하였으며, 한국과 미국, 세계를 상대로 핵위협과 NPT체제에 대해 도전하고 있다. 한국은 비핵과 세계평화라는 노선을 추구하고 있고, 아이러니 하게도 북한은 핵과 평화라는 이데올로기적 노선을 주장하고 있어, 남북한 간에 논리상의 대결도 만만치 않다. 이런 환경 속에서 저자는 NPT체제의 동향에 대해 예리하게 주목하고, 우리 대한민국의 국익을 반영시킨 가운데 NPT체제가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학문적이고 정책적인 연구와 활동을 전개해 왔다. 사실상 저자의 NPT체제에 대한 정책적‧학문적 관심은 남북한이 비핵화 협상을 개시한 1991년에 시작되었다. -- 돌이켜보면, 한국이 처음으로 핵무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72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던 때였다. 1974년에 미국정부가 이를 눈치 채고 다방면으로 압력을 구사하고 나오자, 1976년 1월에 박정희 정부는 핵개발 계획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그 이후 한국의 정부나 학계, 국민들은 핵의 군사적 이용에 관한 모든 생각을 접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핵무기에 대한 관심이 두 번째로 일어난 것은 1990년 탈냉전과 함께 북한 김일성이 핵무기 개발을 시작함에 따라, 이를 막기 위해 한‧미 양국이 공조하여 노력하기 시작한 때이다. 북한의 핵개발을 막기 위해서 한국은 미국의 요청에 의해 북한과의 핵협상에 임하게 되었다. 1976년부터 1991년까지 한국의 국내에서는 핵무기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남북한 핵협상을 제대로 하기 위해 한국의 정책담당자들은 핵무기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지식과 전문성이 필요하였다. 그때에 비로소 정부에서 핵공학자들과의 대화를 시작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비확산 및 핵정책 공동체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남북 핵협상 종사자들이 미국을 방문하여 핵지식과 핵군축, 핵검증에 관한 노하우를 배우기도 했다. 이때에 저자는 1985년부터 6년 간 미국의 하버드대학과 랜드대학원에서 미소 간 핵군비경쟁과 핵군축, 재래식 군비경쟁과 군비통제를 연구하고 관련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1991년 12월부터 1년 간 남북 핵통제공동위원회의 남측 전략수행요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해 12월 제5차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북측 대표가 “지금 남한 땅에 핵무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스 혹은 노우라고 대답하세요”라고 반복적으로 우리측 협상 대표를 코너로 몰아 넣었으나, 우리측 대표는 “시인도 부인도 안하는 것(Neither Confirm Nor Deny)이 우리 정책입니다”라고 반복하여 대답할 뿐 시원한 대화가 되지 않았다. 그 뒤 북한 핵위협이 가시화 될수록 우리도 핵에 대한 지식과 비핵화의 방법, 핵협상 기술과 검증방법에 대해 더 알아야 했다. 그리고 세계의 핵무기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비확산 레짐은 어떻게 되고 있으며, 우리가 북한에 요구할 것은 무엇이고, 한미 간의 협조 및 국제적인 지원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다방면의 지식이 필요했다. 사회과학 중심의 정책공동체와 자연과학의 핵공학공동체 간에 지속적인 융합학문적 접근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북핵협상이 북미 간의 제네바협상으로 넘어가면서 한국은 남북 핵협상 기간 중에 결성되어 운영되고 있었던 핵정책공동체와 핵공학공동체 간의 네트워크가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저자는 1992년 말 남북한 핵협상이 결렬되자마자, 스위스 제네바 소재 유엔군축연구소 소장에게 편지를 보내, 남북한 간 핵협상에 대한 평가를 국제적인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고, 북한 핵문제뿐만 아니라 21세기에 닥쳐 올 중국과 일본, 대만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핵문제를 국제 핵군축과 핵비확산체제의 관점에서 연구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때 유엔군축연구소 소장이었던 Sverre Lodgaard 박사가 저자를 유엔군축연구소의 객원연구원으로 받아 주었다. 이때에 저자는 동북아의 핵군축과 비확산(Nuclear Disarmament and Nonproliferation in Northeast Asia)이란 책을 유엔이름으로 출판하였다. 북한을 포함한 동북아의 핵문제를 광범위한 시각에서 분석하고, 동북아에서 비확산과 핵군축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을 동시에 제네바군축회의(Conference on Disarmament)의 회원국으로 가입시키고, 북한에 대한 IAEA의 핵사찰을 강화할 수 있는 추가의정서(93+2)를 신속하게 통과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이 건의는 몇 년 내에 수용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자와 세계의 핵비확산전문가공동체와의 지속적인 교류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다가 한국이 핵관련 문제에 대해 세 번째로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2010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테러세력의 핵무기 획득과 사용 가능성에 기인한 핵테러리즘을 저지하기 위해 핵안보정상회의를 주창하고 나선 때”였다. 이명박 정부는 2012년 제2차 핵안보정상회의를 서울에 유치하였고, 핵안보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자 정부는 준비자문단을 구성하였다. 이때에 저자는 이 자문단의 일원으로서 김성환 외교통상부장관에게 “1993년에 사라진 한국의 핵정책공동체와 핵공학공동체 간의 융합학문적 네트워크를 다시 재건해야, 앞으로 글로벌 핵문제를 다루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한국이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건의하고 한국핵정책학회를 드디어 출범시키게 되었다. 한편, 에너지자원 빈국인 한국이 1973년 중동 발 오일쇼크에서 벗어나고 에너지의 대외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지하에서 캐내는 에너지가 아닌 인간의 머리에서 캐내는 에너지”라고 불리는 원자력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박정희 정부가 원자력 발전 장기계획을 시작함으로써 한국에는 원자력 발전의 붐이 조성되었다. 박정희 이후 모든 대통령을 거치면서 한국의 원자력은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2016년에 한국은 세계 5위의 원자력발전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2017년 등장한 문재인 정부에서 탈원전을 감행하여 한국은 원자력대국의 꿈이 사라지고, 핵공학 연구생태계는 소멸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2022년 5월 등장한 윤석열 정부가 탈원전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원자력의 제2의 르네상스를 시도하고 있음은 국가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한국이 보편적인 국제핵비확산체제(NPT)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가 낮고, NPT에 가입하여 비핵정책과 핵의 이중성 중에서 평화적 원자력의 발전에 전념하면서도, 비핵화의 장점을 세계적으로 선양하고 국제적 연대를 형성함으로써 국가전략적 측면에서 국익을 챙겨오지 못하고 있음을 실감하였다. 그리고 핵공학 측면에서도 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