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우주과학 연구원이 직조해낸
정교하고 장엄한 정통 SF 소설집
“지구는 사라진다.
태양도 사라진다.
이 빌어먹을 행성을 떠나야 한다”
지구라는 유한한 땅 밖으로 거침없이 뻗어 나가는
살인, 사랑, 광기가 뒤엉킨 압도적 서사 정통 SF 독자를 만족시킬 여섯 편의 소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며 현재 가장 믿음직한 SF를 써내는 소설가로 꼽히는 해도연 작가가 세 번째 소설집 《진공 붕괴》를 출간한다. 이 책을 가리켜 “개연성 있는 과학적 상상력에 푹 빠지기 좋은 기회”라고 평한 정보라 소설가의 말처럼 해도연 작가가 직조해낸 우주에는 우주선과 우주인, 미지의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는 건 물론 각 존재의 근거와 이유도 제시된다. 이는 우주를 수학의 대상으로, 또 사랑과 믿음과 배신과 광기가 펼쳐지는 삶의 형형한 무대로 바라보는 작가의 복합적이고도 치밀한 시선 덕에 가능하다. 많은 SF 작가가 ‘해도연’ 세 글자를 신뢰하는 배경이다.
현직 우주과학 연구원이기도 한 해도연 작가는 장편소설 《베르티아》 《마지막 마법 사》, 소설집 《위그드라실의 여신들》에서 미래와 외계를 주제로 독창적인 세계관을 선보인 동시에 영미 SF소설 《라스트 휴먼》을 우리말로 옮기는 등 소설가와 번역가 양쪽을 오가며 다방면으로 활동해왔다. 《진공 붕괴》는 작가가 이토록 부지런히 다져온 문학적 감수성과 지적 상상력의 총체라 할 수 있는 여섯 편의 매력적인 단편들을 싣고 있다.
우연한 기회로 지구에 당도해 인간의 생기를 모조리 빨아들임으로써 자기 몸을 완성해나가는 기이한 생명체부터 거대 항성을 옮겨 다니며 그 원기에 기생하는 미지의 인공물, 자기 욕망을 위해 타인의 하루를 끊임없이 반복시키는 잔악한 타임루퍼까지. 각 소설은 사랑과 배신, 믿음과 기만, 희망과 좌절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들은 우리처럼 뻔하게 사랑하고 일상적으로 번민하고 예사롭게 무너지면서도 우주인이 보낸 지구 탈출선이나 멸망한 지구의 유토피아, 혹은 무한히 반복되는 하루라는 특별한 시공간을 산다. 이러한 생경한 공간으로 우리가 매일 느끼는 평범한 갈등의 감정을 태연스럽게 끌어들이는 작가의 능력은 독자가 눈앞에 펼쳐지는 환상 세계로서의 우주를 읽고 상상하는 것을 넘어서 온 마음을 다해 작가가 던지는 철학적 화두에 몰입하게 만든다.
“지구는 어딨지? 아니, 달이나 태양이라도”, 〈검은 절벽〉
성간 우주선 ‘다이버전스’를 타고 우주 생명체를 탐사하던 ‘라미’는 우주선 바깥에서 갑작스레 사고를 당한다. 우주복에 묻은 피 웅덩이에 놀란 라미가 동료들을 찾아 허겁지겁 내부로 들어가려 하지만 인공지능 상담사인 ‘러브조이’는 우주선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에 의해 초토화되어 출입문을 열어줄 수 없다고 말한다. 라미는 보이지 않는 그것의 존재를 믿을 수도, 그렇다고 어딘가 의뭉스러운 러브조이를 믿을 수도 없다. 그런 라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비상 탈출선을 타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지구로 돌아가는 것뿐. 그리고 50년 뒤, ‘그것’을 태운 다이버전스가 지구에 당도한다.
“너, 유토피아 계획이라고 들어봤어?”, 〈텅 빈 거품〉
빛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며 알파센타우리 A와 같은 거대 항성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알 수 없는 구체 ‘호버만-다이슨 스피어’가 태양으로 다가오고 있다. 도착 예상 시기는 150년 후. 세계정부는 지구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 150년 동안 오직 행복만을 누리는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상미’는 비극적 결말이 예정된 유토피아에서 미래를 잊고 살 것인지, 외계인이 보낸 탈출선을 타고 정처 없이 우주를 떠돌 것인지 지금 당장 택해야 한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탄소 결정체 덩어리에 의식이 깃들 수 있나요?”, 〈마리 멜리에스〉
인공 뇌를 이식받음으로써 생명을 얻게 된 ‘마리’와 그녀에게 인공 뇌를 이식한 ‘유진’. 마리는 자신의 뇌가 사실은 사랑하는 유진의 죽은 아내의 뇌를 복제한 인공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혼란을 느낀다. ‘유진을 사랑하는 내 감정은 내 것일까?’ ‘유진이 사랑하는 것은 나일까 죽은 아내의 흔적일까?’ 마리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도 자기 안에 피어난 사랑은 의심하지 않는다.
“네가 이 세상에서 나를 몇 번이고 지워도 난 매번 같은 유슬이야”, 〈콜러스 신드롬〉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갖춘 ‘재호’는 콜러스 신드롬을 앓는 딸 ‘윤하’를 지우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지만, 곧바로 후회한다. 그는 윤하와 똑같은 딸을 낳기 위해 아내 ‘유슬’과의 만남부터 출산까지의 전 과정을 답습하고 또 답습하지만, 매번 다른 아이가 태어날 뿐이다. 유슬은 자신의 삶과 딸이 재호의 허황된 욕심 때문에 몇 번씩이나 지워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복수를 결심한다.
“‘그것’은 두 사람의 몸에 촉수로 둘러싸인 입을 가져다 댔다”, 〈에일-르의 마지막 손님〉
남아프리카공화국 천문대로 출장을 간 ‘나’는 그곳에서 검은 면으로 만든 황홀한 맛의 스파게티를 먹는다. 식당 종업원에게 재료를 물어도 생김새가 아주 끔찍한 문어를 사용했다고만 할 뿐 자세한 정보는 알려주지 않는데……. 한편 성간 우주선을 타고 마침내 지구에 안착한 ‘그것’은 인간들을 속이고 조종해 그들의 몸에 침투하고, 그렇게 한 명 한 명 희생시키면서 자기의 진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형체를 갖춰간다.
“그 순간, 피터는 이 완벽한 하루를 내일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안녕, 아킬레우스〉
특정한 하루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타임루퍼를 잡아들이는 임무를 맡은 ‘피터’는 자기 욕망을 영원히 지속시키기 위해 주변인들을 루프에 가둔 ‘마스터’를 찾아간다. 피터는 마스터가 운영하는 카페의 종업원 ‘지니’에게 첫눈에 반하고 마스터 덕에 그녀와 가까워지며 사랑을 키워간다. 그러던 어느 날 지니가 갑자기 사망하고 피터는 타임루프를 깨뜨림으로써 미션을 완수할지, 자기 할 일과 윤리관을 저버린 채 지니와 오늘과 똑같은 내일을 살아갈지 갈등하기 시작한다. 그의 선택은?
기억을 잃은 ‘나’도 ‘나’인가?
삶을 관통하는 날카로운 질문과 과학적 개념으로
사유해보는 우리 안의 욕망
《진공 붕괴》의 주요 재미가 우주와 지구를 넘나드는 ‘존재할 법한’ 가상을 체험하는 데 있다면, 또 다른 재미는 책이 던지는 질문에 있다. 해도연 작가는 다정다감한 단어나 문장으로 세계를 해석하거나 갈등을 봉합하려 하지 않는다. 로맨스가 임박한 때조차 이성적이며 학문적이다.
작가는 주인공을 잔인한, 그리고 더 모순적인 상황으로 내몬 끝에 날카롭고도 결정적인 질문을 건져 올린다. 국가적 대의와 개인적 욕망이 부딪칠 때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검은 절벽〉), 멸망이 예정된 유토피아와 개척 가능성이 열려 있는 불확실한 땅 중 무엇이 더 나은가?(〈텅 빈 거품〉), 타인의 뇌로 인식하는 ‘나’는 과연 ‘나’인가?(〈마리 멜 리에스〉), 기억을 잃은 ‘나’도 여전히 ‘나’인가?(〈콜러스 신드롬〉), 인간의 주관적 인식은 실체적 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에일-르의 마지막 손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채로 내일을 맞을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오늘을 반복할 것인가?(〈안녕, 아킬레우스〉)
각 작품 속 인물은 그게 누구든 깊이 고심할 수밖에 없는 묵직한 딜레마와 마주하는데, 그 딜레마는 읽는 사람의 마음에도 자연스레 피어나 자기만의 욕망과 철학으로 그에 답하게 만든다. 《진공 붕괴》는 이처럼 환상적인 동시에 일상적이고, 전문적인 동시에 철학적이다. 이 책이 하드 SF 장르를 오래 사랑해온 팬들은 물론 소설이라는 장르 그 자체를 탐미하는 이들의 기대를 넉넉히 만족시키리라 확신하는 이유다.
상미는 이번에야말로 할 말을 완전히 잃었다. 외계인과 지구 탈출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