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

김지승 · Essay/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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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년간 새롭고 낯선 문학 쓰기를 수행해온 여성(비남성) 작가들이 꾸준히 주목받아왔다. 한국 독자들이 찾는 세계 작가의 목록은 제인 오스틴, 에밀리 디킨슨 등 오늘날 영미문학사에 이름을 올린 작가들뿐 아니라,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올가 토카르추크, 다와다 요코, 찬쉐, 천쓰홍 등 비서구의 언어와 문화, 소수자성으로 쓰인 문학의 창작자들로 확대되고 있다. 일례로, 2022년 19세기 백인 여성 작가들을 다룬 페미니즘 비평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복간이 그해 출판계의 화제 중 하나였다면, 2024년에는 디아스포라 예술가 테레사 학경 차의 『딕테』의 복간이 더 큰 각광을 받았다. 이민자, 유색인 여성, 비시스젠더의 저작이 백색의 세계 문학 전집을 점점 침범해왔다고 할 만하다. 이는 우리말로 접할 수 있는 ‘여성적 글쓰기’의 사례가 풍부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비남성·비백인·비이성애자 작가들의 글쓰기 각각에 주목하고 적절한 비평과 해석의 자리를 마련하는 과제가 문학·출판계에 주어졌다.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는 개개 작품과 작가를 해설·비평하는 데서 나아가, 이런 작가와 글쓰기가 속한 지형을 그려 보인다. 저자 김지승은 여성적 글쓰기와 다양한 여성 서사, 아픈 몸이 세계와 맺는 관계 등을 탐구해온 작가이자 독립연구자다. 그는 이런 주제들을 사유하고 감각해내는 글을 짓는 한편, 여성적 쓰기와 읽기에 관한 여러 수업과 워크숍 등을 진행하면서 경계를 넓히거나 거기에 머무는 여성 작가들에게 독자가 접속할 수 있는 통로를 세공하고 키워왔다. 이런 실천과 이력에 기반한 이 책은 “친애하는 책장 친족들”을 호명하며 시작한다. 그렇게 이 책은 독자를 ‘마지네일리아’라는 키워드로 여성 작가들의 글/말을 읽어내는 방법론과 이들이 존재하고 작동하는 방식에 함께 다다르는 여정에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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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친애하는 책장 친족들에게 1부 언어와 몸 거의 전적으로 갇힌 ― 샬럿 퍼킨스 길먼, 「누런 벽지 」 평소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영원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별의 시간 』 물고기 여자의 언어 ― 다와다 요코, 『목욕탕』 바다가 검다는 거짓말 ― 마르그리트 뒤라스, 『죽음의 병 』 어떤 이름으로 죽음을 부르는가 ― 버지니아 울프, 『파도』 세계 끝의 시인, 바스러지지 않는 노래 ― 클로디 윈징게르, 『내 식탁 위의 개 』 2부 몸과 타자 묘비와 책 그리고 엄마 ― 메리 셸리, 「보이지 않는 소녀 」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보다 나을 수는 없다 ― 토니 모리슨, 『가장 파란 눈 』 말과 물의 환영(幻影)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고독의 결과 ― 쓰시마 유코, 『빛의 영역 』 한쪽 눈만 감고 잠이 들면 ― 찬쉐, 『황니가』 모든 계절 속의 겨울 ― 앨리 스미스, 『겨울』 모녀, 다중 우주의 타자들 ― 대니얼 콴 · 대니얼 샤이너트,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 3부 타자와 기억 고통이 기억으로 번역되지 않도록 ―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 이토록 뜨거운 공허: M과 N 사이 두 개의 O ― 에스더 이, 『Y/N』 가기/돌아오기, 가기, 돌아오기: 존재의 시차로 도착하는 제3의 장소 ― 테레사 학경 차, 『딕테』 I 죽음이라는 묵음 ― 테레사 학경 차, 『딕테』 II

Description

여성적 쓰기와 읽기의 관계를 탐색하는 동시에 그것을 언어로, 몸으로 수행하는 글쓰기 메리 셸리와 버지니아 울프부터 마르그리트 뒤라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토니 모리슨, 테레사 학경 차, 다와다 요코, 찬쉐… 이들이 기거하는 장소, ‘여백’이 품고 있는 수수께끼와 가능성 최근 새롭고 낯선 문학 쓰기를 수행해온 여성(비남성) 작가들이 주목받아왔다. 한국 독자들이 찾는 세계문학 작가의 목록은 제인 오스틴, 에밀리 디킨슨 등 오늘날 영미문학사에 이름을 올린 이들뿐 아니라,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올가 토카르추크, 다와다 요코, 찬쉐, 천쓰홍 등 비서구의 언어와 문화, 소수자성에 기반한 문학을 하는 이들로 확대되고 있다. 일례로, 2022년 19세기 백인 여성 작가들을 다룬 페미니즘 비평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복간이 그해 출판계 화제 중 하나였다면, 2024년에는 한국계 디아스포라 예술가 테레사 학경 차의 『딕테』의 복간이 더 큰 각광을 받았다. 한국어로 된 ‘여성적 글쓰기’의 사례가 풍부해지는 가운데, 비남성·비백인·비이성애자 작가들의 글쓰기에 주목하고 적절한 비평과 해석의 자리를 마련하는 과제가 문학·출판계에 주어졌다. 이런 흐름 속에서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는 개개 작품과 작가를 해설·비평하는 데서 나아가, 이런 작가와 글쓰기가 속한 지형을 그려 보인다. 저자 김지승은 여성적 글쓰기와 다양한 여성 서사, 아픈 몸이 세계와 맺는 관계 등을 탐구해온 작가이자 독립연구자다. 그는 이런 주제들을 사유하고 감각하는 글을 짓는 한편, 여성적 쓰기와 읽기에 관한 여러 수업과 워크숍 등을 진행하면서 경계를 넓히거나 거기에 머무는 글쓰기에 독자가 접속할 수 있는 통로를 세공해왔다. 이런 이력에 기반한 이 책은 “친애하는 책장 친족들”을 호명하며 시작한다. 그렇게 독자를 ‘마지네일리아’라는 키워드로 여성 작가들의 글·말을 읽어내는 방법론과 이들이 존재하고 작동하는 방식에 함께 다다르는 여정에 초대한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서로의 마지네일리아로 존재하는 법 ‘마지네일리아’는 “책의 여백에 남기는 표식, 주석, 메모, 삽화, 분류할 수 없는 반응의 흔적들을 총칭”(9쪽)하는 단어다. 책 가장자리에, 오랫동안 역사의 주변에 놓였던 비남성 작가/독자들이 자신의 흔적을 남겨왔다. 저자는 여백에 감탄·변경·저항하는 글을 적는 행위를 ‘타자와 접촉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마지네일리아를 적극적으로 의미화할 때 여백은 “상호 관계적 읽기의 실천”(11쪽)이 이뤄지는 공간이고, 여백 쓰기(writing/using)는 전적인 읽기도 전적인 쓰기도 아니다. 김지승은 그가 세심하게 읽고 감촉하고 연결되어온 여성 작가들을 마지네일리아로서 불러들이고, 그들과 그들의 작품 곁에 자신의 마지네일리아를 써넣는다. 이 작업은 텍스트가 불러낸 자기 몸의 기억, 무의식의 이미지를 마주하고 그와 새롭게 관계 맺는 과정이다. 예컨대 아픈 몸과 병실에 갇힌 화자가 조각난 글과 현실을 감각하는 경험이 「누런 벽지」의 ‘나’의 말과 중첩되고, 울프의 『파도』를 매개로 죽은 줄 알았던 친구가 나타나며, 찬쉐의 『황니가』 속 꿈과 현실의 불투명한 경계는 지난 12월 3일 이래로 화자가 겪은 이곳의 국면을 반영한다. 또 화자가 제주에 초대받아 해녀들이 물과 몸과 말과 맺는 관계를 관찰하고 감지한 기록은 『아구아 비바』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리스펙토르가 언어로 만들어낸 ‘살아 있는 물’(agua viva)을 구현한다. 김지승은 흡사 여성 작가들의 텍스트와 개념을 몸 안으로 통과시켜 그것들과 자기 자신을 한데 녹여낸 듯한 문장을 내보낸다. 비평적 거리 두기 또는 자기 서사를 표방하는 데서 벗어나, 액체처럼 “사방에서 사방으로 틈입”(92쪽)하는 그만의 글쓰기라 할 만하다. 이 책은 여성 작가들의 글에 매료되면서도 기존의 틀로 해석되지 않는 수수께끼를 어려워했던 독자들에게 반가운 출입구를 만들어준다. 이 책이 말하는 ‘여백 쓰기’를 통해 이들의 글쓰기가 딛고 있는 땅의 특질을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이 몸과 기억에 남기는 영향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출구는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난다. 저자의 읽고 쓰기가 단일하지도 인과적 구성을 따르지도 않기 때문이다. 양피지적 글쓰기에서 마지네일리아적 글쓰기로 마지네일리아는 이 책에서 그 의미가 확장되고, 물리적인 책의 페이지를 벗어나 곳곳에서 출몰한다. 「서문」을 펼치면 이런 대목을 만날 수 있다(13-14쪽). “여성에게 작동하는 이중 억압은 여백에도 미로를 만든다. 누군가는 그 미로를 탈주해 움직이는 다른 여백을 발견했고, 때로는 이 책처럼 지연된 시간과 의도된 지면에서만 가능했다.” 그리고 ‘움직이는 여백’엔 이런 주석이 달린다. “편지 봉투, 냅킨, 영수증, 찢어진 신문 귀퉁이 등에 글을 쓴 에밀리 디킨슨,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엘렌 식수 같은 여성 작가가 대표적이다.” 이런 예시는 마지네일리아의 특질이 책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양피지적 글쓰기’와 결부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양피지에 기록된 것을 긁어내거나 씻어낸 후 그 위에 덮어쓰기 한”(43쪽) 표면을 가리키는 팰림프세스트는 깨끗하고 온전한 지면이 좀체 주어지지 않는 여성의 글쓰기에 관한 정확한 은유다. 저자는 여성적 읽기와 쓰기가 양피지 같은 “표면”, “지면”, “피부”, “막”, “베일”, “스크린”에서 수행된다는 점을 밝힌다(41, 222-223쪽 참조). 이 책이 두 장을 할애한 “딕테”(dictee)가 받아쓰기를 뜻하듯, 무에서 유를 낳는 창조에 자신의 인장을 찍는 식이 아니라, 받아 쓰고 옮겨 쓰고 덧쓰고 포개고 틈입하는 방식으로 지은 문학이 여성적 영토인 것이다. 김지승의 문학 실천을 ‘마지네일리아적 글쓰기’라 이름해본다면, 서로 다른 형식과 시간대의 문장, 다른 결의 감각이 평행하고 침투하는 글들을 맥락 지을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흑인 여성의 글쓰기와 토니 모리슨의 『가장 파란 눈』을 이야기하다가 화자가 쓴 편지가 불쑥 출현하고, 메리 셸리의 글쓰기를 다루다가 그에 대한 강의에서 했던 화자의 말이 끼어든다. 『딕테』에 관한 두 편의 글에서는 인용과 원문의 오마주가 나란히 겹치고, 다른 흐름 속에 있는 어떤 의식의 기록이 간섭하기도 한다. 이 책은 복수의 목소리와 장르가 한 편의 글에서 겹쳐지는 양상을 시각적으로도 짜임새 있고 아름답게 형상화한다. 본문에 다양한 서식이 활용되고 글자체나 글을 보조하고 꾸미는 장치가 변주하면서 언어의 기표적 차원이 환기되고, 글만으로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특히 각주를 마지네일리아처럼 표현한 디자인에서 책의 여백이 저자뿐 아니라 독자의 것이기도 하다는 걸 체감하게 된다. 읽기의 전복적이고 창조적인 힘 읽기/쓰기, 독자/저자, 죽음/삶의 이분법을 넘는 ‘여성적 읽기’ 이처럼 ‘마지네일리아의 관점’에서 읽는 행위를 이 책은 여성적 읽기라 일컫는다. 엘렌 식수가 여성적 글쓰기와 교차하는 개념으로 제시한 여성적 읽기는 “모호성과 질문, 복수(the plural)에 연루되는 일”(14쪽)이며, 읽기와 쓰기가 맞닿고 순환하는 영역을 열어내는 것이다. 김지승은 이 순환과 관련해 테레사 학경 차의 조어 “발수신자”(sendereceiver)를 유의하게 다룬다. ‘발수신자’는 발신자와 수신자가 언제나 이미 연결돼 있고 결속되어 있음을 뜻한다. 발수신자(또는 그가 다른 글에서 제안한 ‘저독자’[writereader])라는 개념은 읽기와 쓰기, 독자와 저자, 입말과 글말, 사본과 원본, 죽음과 삶 사이 이분법적 경계도 흩트린다. 이를테면 다와다 요코의 글쓰기는 “이차원의 경계를 양쪽으로 밀어 빈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물을 부어 깊이를 더하는”(41쪽) 고유한 방식으로 이분법을 무화한다. 이런 방식을 통하면 여성적 글쓰기가 쓰기보다는 말하기라고 규정하는 논의의 한계에서 탈피하고, 대문자 세계에서 지워져온 목소리, 육체,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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