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대중을 국민으로 이끈 문화적 장치들에 대한 연구
무수한 대중을 국민으로 만드는 일은
소위 객관적 관점을 나약하게 강조하는 어정쩡한 방식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다.
목표를 향해 무자비하고 광적이며 일방적으로 나아가야
이룰 수 있는 일이다.
―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이 책의 소재는 히틀러의 이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왕과 신의 가호에서 벗어난 익명의 대중을 불러내 국민으로 만드는 일은 근대 세계 최대의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많은 정치가와 역사가들이 이러한 프로젝트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분투해 왔다. 모스의 독창성은 파시즘에 대한 통념을 뒤집은 것이었다. 2차 대전 이후 많은 역사가들은 파시즘의 요체를 전체주의적 강제동원 체제로 역사의 정상 궤도에서 이탈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의한 파시즘의 패배는 일탈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낙관적이면서도 순진하게 해석되었다.
모스는 이러한 통념을 뒤집었다. 독일 파시즘은 루소 이래 서구에 팽배했던 인민주권 사상의 구현이며, 강제적 동원이 아니라 자발적 참여와 희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밝힌 것이다. 독일 대중이 국민으로 나아간 길이, 히틀러의 표현대로 무자비하고 광적인 방식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문화적인 방식이었다는 모스의 주장은 서구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더구나 그가 나치즘의 피해자 가운데 하나였으며, 파시즘의 대두를 직접 겪은 현장 관찰자였다는 점에서 충격의 강도는 더 컸다.
모스는 이 책에서 이전의 역사학이 등한시한 것들을 분석한다. 건축양식과 미장센, 각종 동호회와 대중예술, 조명과 합창의 진화가 모래알 같은 대중을 어떻게 강력한 아이덴티티를 가진 국민으로 바꾸어 놓았는지 흥미있게 서술하고 있다.
예로 남성합창단의 진로를 보자. 남성합창단은 중세 이래의 교회합창단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신을 찬양하던 합창단에 독일 민족혼이라는 불의 세례를 내린 것은 나폴레옹 침략전쟁이었다. 불의한 외세에 맞서 노래를 좋아하는 독일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노래패를 결성한다. 그들은 새롭고 애국적인 노래들을 개발한다. 이 노래들은 선풍적으로 독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다. 그 노래들이 갈구한 것은 하나되고 행복한 통일 조국이었다. 그러나 메테르니히 반동체제는 독일의 통일을 저해하고, 이때부터 노래패는 반체제가 되었다. 반체제가 될수록 합창단에는 가속도가 붙고 응집력이 강화된다. 이제 그들의 노래는 온국민의 애창곡이 되었고 합창단원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인 명예가 되었다. 비스마르크에 의한 독일 통일은 노래패에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가져온다. 정부 지원을 받으며 공식 제전에서 찬양가를 부를 수 있게 된 반면, 반체제적 저항성은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일차대전의 패배와 바이마르공화국의 혼란 속에서도 이 노래패들은 민족정신의 강력한 담지자가 되었다. 그후 히틀러의 집권을 여는 동맹 세력의 역할을 충실히 했으나, 종국에는 히틀러의 합창단에 용해되어버리고 만다.
조지 L. 모스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현대사가 오버랩되지 않을 수 없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동원가요는 물론이고, ‘님을 위한 행진곡’ 같은 운동가요들의 운명이 떠오른다. 체제든 반체제든 공통점은 민족주의이다. 흩어진 대중을 하나의 국민으로 만드는 강력한 마법의 노래라는 점이다. 민족주의를 대중들의 마음속에 내면화시켜 자발적으로 참여케 한 것은 히틀러의 공포정치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노래들이었다는 모스의 분석은 과연 우리 현대사와 무관할 것인가. 더구나 21세기에도 이러한 정치문화 양식을 그대로 고수하는 나라가 있다. 다름 아닌 북한이다. 이 책에서 독일이라는 말을 북한이라는 말로 치환시켜면 그대로 문맥이 통한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모스의 명제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 책을 쓴 모스는 독일계 유대인으로 그의 이름을 유대식으로 읽으면 모세가 된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독일의 유력 일간지 <베를리너 타게스블라트>의 발행인이었다. 나치는 이 신문을 아주 미워해 나치가 집권하자 모스 일가는 영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모스는 기숙학교에 다니면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본원적인 체험들이 삐딱한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힘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스는 독창적인 시각으로 역사 연구를 이끈 점을 인정받아, 미국역사학회의 연구상을 받았다.
나치즘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과 더불어 모스의 역사학에 대한 또 하나의 공헌은 문화사와 미시사를 여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모스가 이 책을 발간한 1970년대 중반은 사회경제사가 학계를 휩쓸 때였다. 이때 사격동호회의 역사를 연구하고 기념비 양식의 변화를 추적하는 데 시간을 쓴다는 것은 동키호테 같은 짓이었으리라. 그러나 그후 역사학의 극적인 방향 전환은 모스가 모세만큼이나 선견지명이 있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지금은 역사학자라면 누구나 문화사와 미시사를 언급하고 있지만, 모스는 훨씬 이전에 그것도 혼자 그러한 연구를 수행했던 것이다.
이 책을 옮긴 임지현은 대표적인 탈민족주의 논객으로, 한국 사회의 민족주의 논쟁을 주도해온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이 책의 번역을 여러 해 전에 기획했으나 시간이 없어 이제야 독자들에게 내놓게 되었다고 미안해하고 있다. 공동번역자인 김지혜는 영화와 역사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는 소장 연구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