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에드문트 후설
696p
Where to buy
Rating Graph
Avg4.7(9)
Rate
4.7
Average Rating
(9)
저명한 현상학자 에드문드 후설의 저작. 유럽 학문의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하며 현상학적 위기론을 진단했다. 근대 물리학적 객관주의와 선험적 주관주의의 대립, 선험적 문제의 해명, 심리학적 기능을 설명하면서 인간성의 근본적 위기로까지 표현되는 유럽 학문의 현주소를 밝힌다.

인터파크 MIX & MAX

올 여름 휴가, 인터파크가 쏜다!

인터파크 · AD

Rating Graph
Avg4.7(9)

인터파크 MIX & MAX

올 여름 휴가, 인터파크가 쏜다!

인터파크 · AD

Author/Translator

Comment

1

Table of Contents

1. 생활세계를 통한 선험적 현상학 2. 유럽 인간성의 근본적 생활위기로 표현되는 학문의 위기 3. 근대의 물리학적 객관주의와 선험적 주관주의가 대립한 근원해명 4. 선험적 문제의 해명과 이에 관련된 심리학의 기능 -미리 주어진 생활세계로부터 되돌아가 물음으로써 현상학적 5. 선험철학에 이르는 길 -심리학으로부터 현상학적 선험철학에 이르는 길 6. 부록 1) 유럽 인간성의 위기와 철학 2) 실재성에 관한 학문적 이념화. 자연의 수학화 3) 자연과학적 태도와 정신과학적 태도. 자연주의.이원론 그리고 4) 심리물리적 심리학 5) `현상학` 6) 기하학의 기원 7) 현상학과 심리학 8) `결론`과 `속편`에 관한 보충자료들

Description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은 선험적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Edmund Husserl)의 생전 마지막 책이다. 1937년 출간된 이 책은 전쟁의 검은 구름이 점점 짙어지던 유럽의 상황을 진단하고 인간성의 회복을 고민한 문제작이다. 후설은 제국주의의 심화, 나치의 등장 등 당시 유럽이 겪던 위기를 자연과학적이고 객관주의적 사고의 결과로 보았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과학 문명에 역으로 지배받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를 타계하기 위해 후설은 ‘선험적 현상학’이라는 철학적 투쟁을 제안한다. 인공지능이 신문 기사를 쓰고 바둑으로 사람을 이기며 전쟁터에서 작전을 수행할 정도로 과학 문명이 심화된 오늘날 후설의 현상학도 생명력을 더하고 있다. 이에 한국현상학회장을 역임했던 이종훈 교수(춘천교대)가 1997년 번역했던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을 다시 번역했다. 최근 학계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반영했고 일반 독자도 이해할 수 있게 표현을 손봤다. 현상학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의 삶과 철학 후설은 평생 한눈팔지 않고 학문에만 매진한 철학자다. ‘무미건조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그의 삶은 연구로만 채워져 있다. 물론 유대인으로서 나치에게 수모를 당한 적이 있지만 그때도 후설은 묵묵히 자신의 본업, 철학에만 매달렸다. 물론 현실에 눈감은 것은 아니다. 풍전등화의 유럽을 바라보며 자신의 철학을 점점 더 날카롭게 벼려갔다. 1859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모라비아에서 태어난 후설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2년간 천문학을 공부한 뒤 1878년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4년간 수학을 전공한 ‘이과생’이었다. 1882년에는 「변수 계산론에 관한 기고」라는 논문으로 수학박사학위까지 받은 그가 20세기를 풍미한 대철학자가 된 계기는 매우 사소했다. 재야 성직자이자 은퇴한 교수였던 철학자 브렌타노(Franz Brentano)의 강의를 우연히 듣고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남은 생을 철학에 투신하기로 한 것이다. 곧바로 브렌타노의 제자가 된 후설은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심리학적 관점으로 ‘이성의 본질’을 해명하려 했다. 가령 ‘A=B이고 B=C이면 A=C’라는 명제는 절대 변하지 않는 본질이다. 후설은 이런 불변의 본질이 인간의 심리 과정에서 생겨난다고 생각했는데 연구를 거듭할수록 인간의 심리란 언제라도 변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결국 이성의 본질이란 인간의 심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함을 인정하고 심리주의에서 본질주의(이성주의)로 대전환하게 된다. 후설은 본질주의에 큰 영향을 받는데 심지어 주관적 심리 작용에도 변하지 않는 본질, 즉 ‘선험적 주관성(순수의식)’이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때 선험적 주관성이 있음을 알아내기 위해 후설이 사용한 방법이 그 유명한 ‘에포케’(판단중지)다. 판단중지는 변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을 일단 무효화하고 “변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변할 수 없는 지식”을 찾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눈앞에 잘 익은 사과가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 사과를 보며 껍질이 빨갛다거나 한입 베어 물면 단 과즙이 느껴질 거로 생각한다. 판단중지는 이러한 일상적인 인식 전부를 무효화하고 사과의 본질에 대한 지식을 찾으려 한다. 아주 급진적인 인식을 시도하는 것이다. 후설은 이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우리 의식에 주어지는 그대로 기술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판단중지 과정을 통해 찾아낸 선험적 주관성은 절대 변하지 않는 세상의 얼개다. 덜 빨간 사과도 있고 더 빨간 사과도 있지만 사과에는 사과이게끔 하는 어떤 본질이 있다. 세상은 그런 본질로 짜여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후설은 인간에게도 그런 얼개가 있으며 인간의 얼개가 세계의 얼개에 우선한다고 보았다.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은 바로 이 인간의 얼개가 지닌 가능성을 추적한다. 인류 문명이 가장 위기에 처해있던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은 인간이 근대에 들어서 어떻게 변질되었으며 그 원인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다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 후설은 답을 찾기 위해 우선 ‘학문’에 주목한다. 후설은 한 시대의 지배적인 학문 풍토를 알면 그 시대의 인간상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고로 학문이란 인간이 무엇을 고민하고 탐구하는지 또 그렇게 형성된 인간성은 어떠한지를 늘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때 후설은 이상적인 인간상을 “자유롭게 이성을 발현해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는 존재”로 상정한다. 따라서 올바른 학문이라면 이성의 능력을 함양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후설이 보기에 근대의 학문은 이성을 포기하고 오직 감각으로만 세상을 대하는 법을 가르쳤다. 인간 자신도 감각으로 확인되는 수많은 것 중 하나로 전락해버렸다. 감각적 확인 또는 계산적 이성만을 추구하는 실증주의가 득세한 근대는 후설에게 곧 ‘위기상황’이었다. 근대 물리학(과학)의 성공과 물질사회의 번영은 삶의 ‘질’보다 ‘양’을 더 추구하게 했다. 더 많은 게 무조건 좋은 것이다. 후설이 죽은 지 80여 년이 흘렀지만 이러한 상황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80년 전보다 더 많은 돈을 벌지만 더 많이 행복한가? 후설은 참으로 행복한 세계는 물리학의 세계, 물질문명의 사회가 아니라 ‘생활세계’라 주장한다. 절대 수치화·수학화할 수 없는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세계 말이다. 여기서 역사와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가 뿌리내리고 삶을 살아가는 구체성 그 자체다. 이 생활세계가 인간성 회복의 보루다. 계산적 이성으로 주판을 튕기는 일은 돈을 많이 벌게 해줄 수도 있고 그 돈으로 원하는 모든 걸 하게 해줄 수도 있지만 ‘돈을 번다’는 행위로 인간의 삶을 한정 짓는다. 시야가 좁아진 사람은 바로 옆에서 누군가 죽어가도 알지 못한다. 반면에 순수이성에 기초해 ‘보편적’ 이상과 규범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삶의 기준을 ‘스스로’ 세우는 사람은 자유로우면서도 인류애가 넘친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역사와 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처럼 “생활세계로의 환원”이야말로 후설이 위기에 빠진 유럽에서 선험적 현상학을 외친 이유다. 우리의 삶에 가격표를 붙이지 말라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은 과학문명과 물질문명에 맞서는 철학적 투쟁이다. 우리의 존재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투쟁이다. 단순히 로봇이 우리의 직장을 빼앗고 스마트폰에 중독되는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삶을 계산하는 태도 자체가 문제다. 가장 가슴 아픈 예가 바로 주거권을 둘러싼 문제다. 우리나라는 70~80년대 급격한 산업화를 이루며 불도저로 밀어버리듯 재개발을 진행해왔다. 재개발 해당지에 살던 사람들에게 얼마간의 돈을 산정해서 지급하고는 내쫓아버린다. 옛날에는 ‘달동네’라는 용어로 나름 낭만을 풍기더니 몇 년 전에는 ‘뉴타운’이라는 아름다운 용어로 본질을 가리고 최근에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자못 세련된 용어 뒤에서 국가권력이 하던 일을 자본에 슬쩍 밀어주고 있다. 물론 정부의 도시계획도 중요하고 토지 소유자의 재산권도 보호해야 한다. 다 고려해야 한다. 한데 그 고려에서 정작 제일 중요한 ‘살던 사람들’의 삶이 빠져 있다. 이건 수치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수치화할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베냐민이 말했듯 “거주한다는 것은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생활세계의 역사와 문화에 뿌리내리는 일이다. 그 뿌리가 갑자기 잘리면 죽을 수밖에 없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아버지가, 용산의 철거민들이 속절없이 죽은 이유다. 후설이 보기에 우리 사는 이곳은 잔인한 세계다.

Collections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