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없는 수단

조르조 아감벤
23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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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정치사상의 주요 범주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며 도래할 정치의 윤곽을 제시한 책. 9.11 사건으로 문제의식의 적실성이 인정된 '호모 사케르' 연작의 조르조 아감벤은 이 책을 스스로 '사유의 실험실'이라고 불렀다. 저자의 실험실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칼 맑스, 미셸 푸코와 같은 수많은 동시대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인간의 자연적 생명, 강제수용소, 언어활동, 순수 수단과 몸짓의 영역 등의 경험과 현상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 수록된 각각의 텍스트는 특정한 정치적 문제를 나름의 방식으로 사유한다. 오늘날 정치가 하위에 있다면 그 이유는 정치가 그 자신의 존재론적 지위를 의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전제로 하여 저자는 흔히 정치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 경험과 현상 속에서 고유하게 정치적인 패러다임을 탐구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목적 없는 수단> 한국어판은 200자 원고지 170매 분량의 해설을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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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제1부 1. 삶-의-형태 2. 인권을 넘어서 3. 인민이란 무엇인가? 4. 수용소란 무엇인가? 제2부 5. 몸짓에 관한 노트 6. 언어와 인민 7. [스펙터클의 사회에 관한 논평]에 부치는 난외주석 8. 얼굴 제3부 9. 주권적 경찰 10. 정치에 관한 노트 11. 이 망명지에서: 이탈리아 일기, 1992~94년 옮긴이 상세 주석 원문출처 간주곡/Intermezzo: 새로운 정치철학을 위한 아감벤의 실험실 찾아보기

Description

아감벤의 정치철학적 전환을 예고한 사유의 실험실 여기에 수록된 텍스트는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해당 텍스트가 생겨난 상황에 따라서 여전히 열려 있는 실험실과 마찬가지이다. 이어질 각 텍스트는 때로는 그 실험실의 원초적 중핵을 예고하고, 때로는 단편과 파편을 제시한다. 모든 사유의 거장에게는 성숙기 저작을 예고하는 맹아적 저작이 있다. 가령 ‘자본’의 칼 맑스에게는 ‘그룬트리세’, ‘철학적 탐구’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에게 ‘청갈색 책’이 있다.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9?11사건으로 그 문제의식의 적실성이 입증된 ‘호모 사케르’ 연작의 조르조 아감벤에게는 이 책 ‘목적 없는 수단’이 바로 그와 같은 맹아적 저작이다. 스스로 ‘사유의 실험실’이라고 불렀던 이 책을 출판함으로써 아감벤은 그저 박학다식할 뿐인 한 명의 미학자에서 전 세계 비판적 지성들의 사유를 자극하는 급진적 정치철학자로 변모했다. 자신의 실험실에서 아감벤이 실험한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아감벤은 서구 정치철학(그리고 제도로서의 [의회]민주주의)을 지탱해온 주요 개념들의 적합성을 철저히 의문에 부쳤다. 정치라는 개념 자체, 근대의 지배적 국가형태로서의 국민국가, 모든 정체의 운영원리로 여겨지는 민주주의, 법에 근거한 권리와 인권의 보장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서구 정치전통의 모든 범주를 비판함으로써 아감벤이 궁극적으로 사유하려는 것은 정치 본연의 임무, 즉 행복한 삶이다. 살아 있음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가 되는 삶, 즉 살아가는 와중에 무엇보다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 아감벤은 이 ‘행복한 삶’이 정치철학의 기초가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거꾸로 말하면 아감벤의 이런 주장은 기존의 정치철학적 개념으로 행복한 삶을 사유하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됐으며, 한때 유행한 ‘역사의 종언’이나 ‘정치의 종언’ 같은 표현은 국민국가라는 국가형태가 인간의 행복한 삶을 더 이상 보장할 수 없게 됐다는 사태를 지칭할 뿐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아감벤은 자신의 실험실에 수많은 ‘사유의 동시대인들’을 초대한다. 주요 인물 몇 명만 꼽아 봐도 아리스토텔레스, 칼 맑스, 마르틴 하이데거, 발터 벤야민, 기 드보르, 미셸 푸코, 장-뤽 낭시 등 한 명씩만 따로 설명하더라도 책 한 권 분량은 거뜬히 나오는 쟁쟁한 인물들이다. 그러다보니 많은 일반 독자들이 아감벤의 논의를 따라가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며, 실제로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독자들의 이런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서 ‘목적 없는 수단’ 한국어판은 200자 원고지 170매 분량의 해설을 수록하고 있다. 오늘날 유럽에서 진행 중인 다양한 사유의 실험을 그 정확한 맥락과 더불어 국내에 소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던 두 신진 연구자 김상운(안토니오 네그리, 파울로 비르노)과 양창렬(질 들뢰즈, 자크 랑시에르)이 쓴 이 해설은 ‘목적 없는 수단’이라는 복잡한 실험실 내부를 안내해주는 최상의 길잡이이자 40여 년에 걸쳐 진행된 아감벤의 사유 전반을 일관된 관점에서 정리한 국내 최초의 논문이다. 수많은 현대 사상가들이 유행처럼 찾아왔다가 쉽게 잊히곤 하는 국내의 척박한 현실에서 이 두 신진 연구자의 글은 아감벤의 사유를 우리의 관점에서 진득하게 사유하는 데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도래할 정치를 위한 사유의 노트들 아감벤으로 하여금 사유의 실험을 하도록 만든 것은 소련 공산당의 몰락과 그에 따른 민주주의-자본주의 국가의 세계 제패였다.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체제가 있다고, 역사가 지금보다 더 진보할 수 있다고 약속한 공산주의의 몰락을 두고 혹자는 ‘역사의 종언’을 노래했다. 공산주의의 몰락은 역사의 목적=진보가 자본주의에서 달성됐다는 사실을 입증해줬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진보가 없으니 더 이상의 역사도 없는 셈이었다. 흔히 정치철학자들은 국민국가야말로 이런 역사의 목적을 완수하는 수단이라고 말해왔다. 따라서 진정 역사가 종언을 고했다면, 즉 역사의 목적이 이뤄졌다면 그 수단인 국민국가 역시 응당 종언을 고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맥락 속에서 등장한 역사적 심급일 뿐인 국민국가는 사라지기는커녕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 더욱더 격렬한 싸움(전지구적 내전)에 휘말려 들어갔다. 아감벤은 국민국가를 지탱해왔던 주권, 법/권리, 국민/민족, 인민, 민주주의 같은 개념이 이런 현실 속에서 그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렸으며 결국 완전히 무화됐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아감벤은 이런 위기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여긴다. 정치적 사유 본래의 임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환영’과 ‘알리바이’가 이런 혼란 속에서 드디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의 종언이 선포된 이 시점에서 우리가 사유해야 할 정치 본래의 임무란 과연 무엇일까? 아감벤에 따르면 그것은 ‘행복한 삶’의 실현이다. 행복한 삶이라는 이 정치철학의 기초는 그동안 인간을 특정한 귀속조건(국민, 시민, 프롤레타리아트 등)에 속한 주체로 만들어왔던 국민국가에 의해 무시되거나 억압되어왔다는 것이 아감벤의 생각이다. 실제로 국민국가의 형성 전후의 모든 역사(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 자체)는 국민, 시민,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명목 아래 위(권력, 지배자, 자본 등)로부터 임의로 부과된 그 어떤 목적을 위해 인간이 한갓 수단으로 전락한 역사가 아니었던가? 사실 따지고 보면, 일종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아감벤의 사유에 붙어 다니는 ‘예외상태’란 이처럼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목적을 위해 치달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주권권력의 작동방식을 포착하는 개념이며, ‘호모 사케르’란 이런 예외상태 속에서 주권권력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벌거벗은 생명을 포착하는 개념이다. 요컨대 아감벤이 일관되게 사유하는 테마, 아감벤의 정치적 기획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테마는 더 이상 주권권력이 자신의 고유한 주체를 만들기 위해서 전제하는 벌거벗은 생명이지 않을 수 있는 삶, 즉 행복한 삶의 구축이라고 할 수 있다. ‘목적 없는 수단’은 바로 이런 테마의 모든 주요 개념이 등장하는 무대이다. 우리는 어떻게 행복한 삶에 이를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아감벤은 우리의 신체, 우리의 몸짓 자체를 “수단으로 남아 있으면서 목적과의 관계로부터 해방된 수단”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감벤에 따르면 인간 삶의 목적인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다른 목적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행위는 다른 목적을 가질 수 없다. 잘 행위한다는 것이 행위의 목적 자체이니까”(아리스토텔레스). 이런저런 목적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순수 수단이 될 때 인간의 신체, 몸짓은 그 잠재된 역량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잠재된 역량을 되찾은 인간은 더 이상 특정한 정체성에 매몰된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자체, 임의의 독특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가 되는 삶이란 살아가는 모든 방식, 모든 과정이 무엇보다 삶의 가능성이며 역량인 삶, 역량을 지닌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순수 수단으로 삼아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을 실험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삶이 행복한 삶 아니겠는가? 따라서 아감벤은 ‘도래할 정치’를 이렇게 정의한다. 정치란 “그 자체가 목적인 목적의 영역도 아니고 이러저러한 목적에 종속된 수단의 영역도 아닌, 인간 사유와 행위의 장으로서의 목적 없는 순수 매개성의 영역”이므로 “도래할 정치는 더 이상 새로운 혹은 옛 사회 주체들에 의한 국가의 정복이나 통제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국가와 비-국가(인류) 사이의 투쟁이며, 임의의 독특성들과 국가조직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탈구/분리”라고 말이다. 서구 정치사상의 주요 범주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며 ‘도래할 정치’의 윤곽을 제시한 이 책 ‘목적 없는 수단’은 우리가 아감벤을 한때 ‘소비’하고 잊을 골치 아픈 지적 유행품이 아니라 ‘사유의 동시대인’으로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눠야 할 사상가로 인정할 수밖에 없고, 인정해야만 하는 이유를 잘 보여주는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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