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왓슨의 손끝에서 태어난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생각의 역사1-불에서 프로이트까지’는 들녘이 교양시리즈로 펴내는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의 아홉 번째 타이틀로 고등학생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인류 지성사에 관심을 가진 일반 대중이 읽을 수 있는 인문교양서이다. 그러나 이 책은 서술 방식과 내용, 그리고 양적인 면에서 기존의 인문교양서와 맥을 달리한다. 독특한 견해로 역사를 관통한다는 점, 자칫 천편일률적이 될 법한 인류의 지성사를 저자의 향기로 버무리되 이를 흥미롭고 정교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7천 매에 가까운 방대한 양을 통해 철학, 예술, 상식, 과학, 종교, 신념, 세계관 등을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문자 그대로 ‘저자의 향기가 투영된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 할 만하다.
저자 피터 왓슨은 영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문화사가로 디트리히 슈바니츠(‘교양-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의 저자)나 빌 브라이슨(‘거의 모든 것의 역사’의 저자)처럼 학문적 크로스오버가 가능한 저술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오랫동안 영국 BBC 방송국의 문화예술 프로그램 제작에 직접 참여하면서 시청자들에게 폭넓고 다양한 문화사적 지식을 전달하는 일에 앞장서 왔다. 그의 저작은 국내에서 이미 1997년 청림출판사의 ‘소더비’를 통해 소개된 바 있다. 들녘 출판사는 근대 정신사를 다룬 ‘생각의 역사2-20세기 지성사’(2009년 10월)와 미술계와 미술시장을 다룬 ‘메디치의 음모’(2010년 상반기)를 출간할 계획이다.
플라톤적 관심을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이해하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은 “왕과 황제, 왕조, 장군들이 빠진 역사, 군사 원정, 제국 건설, 정복과 평화조약이 누락된 역사”다. 그래서 역사를 보는 시각도 다르다. “시간을 기원전과 기원후로 구분하는 것은 누가 언제부터 생각한 것인가? 플러스(+)와 마이너스(-) 기호는 언제 어디서 수학에 도입되었는가? 현대에는 자살 테러가 많이 일어나는데, 낙원에 가는 영광을 얻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또 낙원이라는 묘한 관념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나의 전반적 목적은 우리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친 생각과 발명을 확인하고 논의하는 데 있다.”
플라톤이 정신을 물질보다 우월하다고 본 이후부터 생각의 역사는 늘 일반화로 빠져들었다. 자아나 지식, 존재의 본질, 역사, 그리고 종교나 신, 삶과 사회에 대한 질문은 수백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본적으로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지성사는 여전히 정신을 논의의 중심에 둔 채 수박겉핥기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왓슨은 바로 이 지점에 분석의 칼날을 들이댄다. 즉 인간의 정신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류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발전을 거듭해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생각과 실험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류의 역사가 진보되었다고 간주한다. 이렇듯 ‘생각의 역사1’은 한 마디로 “플라톤적 관심에서 출발한 서양의 지적 전통을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영혼.유럽.실험의 세 가지 관념으로 인류 지성사를 쾌도난마하다!
왓슨은 자신의 담론을 “영혼, 유럽, 실험”의 세 가지 관념으로 못 박으면서 일반대중을 위한 지성사를 개괄한다. 추상적 사고의 초기 징후-조상 인류가 만든 석기-로부터 논의를 시작해 3만 년 전에 만개한 예술, 뒤이은 농업혁명을 조망하고, 그런 다음 고전기 그리스를 역사상 전무후무한 생각의 배양기라고 평가한다. 이 때문에 그는 ‘유럽’을 세 가지 주요 관념의 하나로 포함시킨다. 왓슨은 또 이슬람, 인도, 중국의 중요한 지적 영향을 다루면서도 사고 행위가 일어난 곳이 유럽이라고 말한다. 이 같은 유럽 중심주의는 학술계의 격렬한 비난을 받고 있지만 왓슨은 서양 사상의 주요 단계들을 고찰하면서 굳이 그 흔적을 감추고자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동양에 대한 시선을 거두지 않음으로써 인류 지성사의 발전에 균형 감각을 부여한다. 학계에서는 이제까지 비서구 전통의 철학자들을 소홀히 취급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영국의 경험론자, 독일의 관념론자들을 훑어보는 것 이외의 지적 전통을 잘 알지 못하는 대다수 영어권 철학자들에게 전 인류의 지적 유산의 전통을 기대하는 것은 사실 무리다. 동서양의 인간관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왓슨은 서구 사상 중심의 문화적 편협함을 거부하고 시공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동양의 사상을 정리한다. ‘생각의 역사1-불에서 프로이트까지’가 기존의 사상사에서 흔히 보는 따분한 플라톤 류의 이야기보다 매력적인 것은 이 같은 특장 때문이다.
자연주의적 입장에서 쓴 포괄적이고 독특한 역사서
왓슨은 이 책에서 언어의 탄생에서 무의식의 발견까지, 나아가 공장의 관념과 아메리카의 발명, 19세기 유물론에서 논박된 영혼의 관념, 모호한 자아의 개념에 이르기까지 정신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주제들을 섭렵한다. 또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과학혁명, 계몽주의 등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세계를 명료하게 서술하는 데 역점을 두면서 자연철학자로서의 입장을 견지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그의 저작은 관념의 전개과정을 다룬 일반 지성사와 차별성을 획득한다. 그는 인간의 생각이 자체의 내적 동력만이 아니라 기후 변화나 신종 질병의 출현과 같은 자연환경의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도 발전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주의적 입장을 취한 덕분에 왓슨은 생각의 역사에서 흔히 등한시되면서도 중대한 몇 가지 전환점을 찾아낸다. 자연주의 철학은 대개 인간이 이성을 통해 진보한다는 계몽주의적 믿음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왓슨은 토머스 홉스나 르네 데카르트 같은 인물보다 초기 계몽주의 형성에 더 큰 역할을 했던 스피노자에 주목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성만이 아니라 본능으로도 살아간다. 고양이가 사자의 자연법에 제약되어 살 수 없듯이 인간도 계몽적 정신의 명령에만 묶여 살 수는 없다.”고 한 스피노자의 말을 인용한다. “플라톤적 관념인 ‘내적 자아’의 오류 가능성을 직시하고, 우리의 ‘내적’ 본성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동물로서의 역할과 위치를 보는 편이 더 낫다”는 저자의 결론은 “인간 세계를 바라보기 위한 좋은 창문은 수도원보다 동물원이다.”고 한 영국 철학자 존 그레이의 말과 더불어 우리에게 다른 방향에서 인류 지성사를 개괄할 수 있는 생각의 단초를 제공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