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라캉의 주저, 한국어판 최초 완역!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이후 가장 위대한 정신분석 저서.
20세기 인문학의 핵심 주저.
라캉 없이 들뢰즈, 푸코, 데리다 등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에 관해 이야기하든, 정신분석에 관해 이야기하든 아니면 이론 일반에 관해 이야기하든 …… 지난 수십 년 동안 사유의 공간을 변형시킬 수 있던 것 중 라캉과의 모종의 토론, 라캉의 도발 없이 가능했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자크 데리다, <라캉을 사랑하기 위해>
“[라캉을 통해] 우리는 철학과 인간과학이 인간 주체에 대한 매우 전통적인 이해방식에 의존하고 있으며, 몇몇 사람이 말하는 대로 주체는 근본적으로 자유롭다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주체는 사회적 조건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발견했다. …… [라캉의] 글쓰기의 모호성은 주체의 복합성 자체에 상응하는 것으로, 그의 글을 이해하려면 ‘나’를 완전히 바꾸는 어떤 작업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 미셸 푸코, <코리에라 델라 세라>
“우리가 무의식의 코드라는 이처럼 비옥한 영역을 발견하고 의미의 연쇄 전체 또는 몇몇 연쇄를 통합해낼 수 있게 된 것은 라캉 덕분이다. 이 발견은 정신분석을 전면적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의사들, 분석가들, 피분석가들에게 무의식의 이론을 가르쳐야 했던 라캉은 그들에게 말의 수사학을 통해 무의식의 언어에 상당하는 어떤 무언극 같은 것을 제공한다.”
― 루이 알튀세르, <입장들』
저작권: 600달러, 기간: 무제한, 조건: 책이 완역될 때까지 Don’t ask, Don’t tell.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자 루만은 1968년에 빌레펠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취임하며 제출한 연구 계획서에 이렇게 적은 바 있다. ‘연구 주제: 사회체계이론, 연구 기한 30년, 연구비 0원.’ 아마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이번에 출간되는 <에크리>에 대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프랑스의 저작권자인 자크 알랭-밀레와 계약한 것이 1994년이므로, 이 책의 번역이 시작된 지 얼추 25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 책은 그동안 진행과 멈춤을 무한히 반복했고, 새로운 시작에의 용기와 무한 반복되는 듯한 좌절이라는 기나긴 터널을 거치며, 과거의 창고에서 먼지 쌓인 원고를 되찾아 미래를 위해 개고하고 개정하는 ‘동일성의 영구회귀’를 거의 무한으로 거듭해왔다. 그러면서도 유일하게 잃지 않은 하나의 목표가 있었으니 20세기의 정신분석(학)을 넘어 인문학의 최고 에베레스트 중의 하나인 이 책을 가독성 있게 번역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종의 ‘지적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도록 완역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 긴 시간 동안 프랑스의 저작권자나 번역자들은 어떤 추가 비용도 요구하지 않았으니 본서에 지출된 ‘번역비’ 또한 들인 노력에 비하면 0원인 셈이다. 오직 ‘즐거운 고통’만이 이 어려운 난문에 직면했을 때의 좌절과 함께 뒤통수를 망치로 후려치는 ‘지적 오르가즘’ 사이를 겨우 통과할 수 있도록 해줄 뿐이었다.
물론 20세기 인문학의 최고봉 중의 하나인 이 <에크리>의 등정은 셰르파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는데, 영어본과 독일어본 등이 그것이었다. 역자들과 편집부는 초역의 완역이 끝난 후 거의 3년 동안 이 두 완역본을 비롯해 일본어판과 이탈리아어판 등 가능한 모든 판본을 동원해 모든 문장을 여러 차례 교차 대조했으며, ‘이해 불가능한 것은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확인까지는 해두자’는 원칙에 따라 최고 번역본을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관련해 영역본의 성취와 한계는 오히려 이 책의 번역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해준다. 영역 이전에 <에크리> 번역으로는 스페인어판과 일본어판이 유명했는데, 두 판본 모두 라캉의 지도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1971년에 라캉이 일본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번역된 일본어판은 라캉이 여러 번역자와 일일이 토론과 논의를 거쳐 이루어졌지만 여러 성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에크리>에의 본격적인 접근에는 한계를 가진 것으로 평가될 정도로 이 책은 번역이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스페인어판 또한 라캉의 지도하에 이루어져 거의 정본으로 인정받았지만 10여 년 전에 라캉 그룹 사이의 내부 투쟁 와중에 ‘1,000’가지 이상의 오류가 있는 것으로 (일부에서) 주장되었다. 영역본의 경우 이 스페인어판을 참조한 데다 밀레의 직접 지도하에 번역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뒷부분으로 가면서는 여전히 오역이 제법 눈에 띄는 것은, 이 책이 얼마나 거봉으로 범인의 접근을 불허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영역자 서문을 보면 저자가 얼마나 많은 재정적 지원과 함께 엄청나게 많은 동료의 후원 그리고 시간적 여유를 가졌는지를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20세기 인문학의 에베레스트는 완등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가장 좋은 번역은 최근 완역된 독일어판처럼 보이는데, 이 점은 특히 라캉이 프로이트를 정점으로 하는 정신분석학자라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원래 프랑스어본 편집자 프랑수아 발은 이 난해한 책을 오탈자 하나 없는 책으로 만든 것으로 유명한데, 독일어 번역자가 농담 삼아 발의 오류를 ‘드디어 하나’ 발견했다는 투로 농담을 던질 정도로 독일어본은 완벽한 번역에 가까워보인다.
이처럼 한국어판은 라캉의 원서에 대한 철저한 분석은 물론 위와 같은 여러 셰르파의 도움을 얻어 기왕의 동서양의 어느 번역본보다 더 나은 번역본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왜? 그것은 이 책이 인간에 대한 가장 깊고 넓은 이해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라캉 말대로 또는 정곡을 찌르는 푸코의 지적대로 “우리(태도)를 바꾸기만 한다면” 난해한 책이 아니라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감히 평론가 김현의 말을 따르자면 ‘괴롭지만, 그러나 즐거운 독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장 깊은 심연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 자체에서도 라캉은 위대하지만 그것에 접근하는 방식, 스타일, 문체에서도 라캉은 20세기의 여느 대가를 넘어선다. 따라서 인간과 세계에 대해, 주체와 욕망에 대해, 그리고 이 둘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은 채 라캉은 어렵다’는 알리바이를 대지 말고 ‘거울 단계’나 ‘로마 담화’ 둥 어느 것 하나라도 끝까지 버티고 읽는 것은 독자에게 이 책이 ‘즐거운 지옥’과 함께 ‘지적 오르가즘’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작금의 ‘인문학 열풍’ 또는 심지어 ‘연예 인문학’은 ‘싱거운 천국’이다. 여기 라캉의 <에크리>의 ‘즐거운 지옥’이 있다! 보들레르는 ?여행에의 권유?에서 그곳에서는 ‘말도 않으리/생각도 않으리’라고 노래하는데, 기왕의 인간 이해에 대해서는 ‘말도 않고/생각도 않게 해줄’ <에크리>에의 여행을 권유한다.
라캉 없는 20세기 인문학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모든 것이 여기 이 한 권의 책 속에 담겨 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가장 깊고도 넓은 사유를 길어 올리고 있는 책. “나는 사유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쓰여지고 말해지는 존재이다.”
1966년에 푸코의 <말과 사물>과 함께 출간된 이 책은 ‘모닝 빵’처럼 팔려나간 것으로 유명하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푸코의 책이 대단한 대중적 반응을 끌어낸 것은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그의 책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는 만큼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해는커녕 막상 끝까지 읽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이 책이 대중적 성공을 거둔 것은 하나의 문화적 사건이었다. 프랑스에서 본격 철학서가 ‘아침 빵’처럼 팔려나간 것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이후 처음이었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그래도 실존주의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존재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