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작고’, ‘물렁하고’, ‘위대한’이라는 세 단어는 작가 정정엽이 자신의 작업 속 존재들을 형용하기 위해 선택한 표현이다. 팥, 콩, 나물, 감자싹, 나방, 그리고 여성—우리 주변의 작고 연약한 존재들에 대한 그의 시선은 이들을 확대하고 주목하게 만듦으로써, 새로운 세계관과 감각의 전환을 제안한다. 이 책 『작고, 물렁하고, 위대한』은 그와 같은 시선을 바탕으로 정정엽의 예술 세계를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한다. 정정엽은 지난 40여 년간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흐름 속에서 민중미술과 여성주의 미술의 교차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해온 작가다. 1980년대 노동운동에 직접 참여하며 활동한 그는, 남성 중심의 민중미술 담론에서 벗어나 여성미술연구회에 참여하며 육아, 가사노동 등 가시화되지 않던 여성의 노동과 삶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작업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와 주변부를 중심에 두며, 소외된 존재들의 생명력과 존엄을 화면 위에 되살린다. 이 책은 기존의 평가 틀을 넘어, 작가로서의 정정엽의 삶과 예술적 비전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비평가 남웅, 양효실, 이병희, 임옥희 네 명의 필진이 각기 다른 시각에서 그의 작업을 분석하며, 민중미술과 여성주의의 범주를 넘어서는 동시대적 의미를 탐색한다. 이들의 글은 정정엽의 작업을 통해 우리가 공동체, 인간성, 삶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의 기획자이자 편집자인 강성은은 정정엽 작가와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두 사람은 2000년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 정정엽의 세 번째 개인전 《봇물》을 계기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이후 강성은은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에서 열린 《걷는 달》(2021)과 동양장 B1에서 열린 《여자는 길을 좋아한다》(2022)의 기획자로서, 정정엽의 주요 작업 중 동시대 여성을 그린 작품을 조명했다. 이러한 시간 속에서 정정엽의 예술적 여정에 깊이 공감해온 강성은은, 이번 책을 통해 그간의 비평적 성과를 종합하고 새로운 관점을 열어 보이고자 했다. 『작고, 물렁하고, 위대한』은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담은 책을 넘어, 예술이 사회적 감수성과 철학적 사유를 어떻게 촉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정정엽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작고, 물렁한’ 존재들이 지닌 ‘위대한’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되며, 그로부터 새로운 연대와 사유의 출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2~2023년 ‘작가-조사-연구-비평’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