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이 유례없이 득세한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
여성의 삶은 얼마나 나아지고 있을까?
최근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 조사에 의하면, 지난해 개봉한 순제작비 30억 이상의 실사 한국영화 39편 가운데, ‘벡델테스트’(영화 속 젠더 편향성을 가늠하는 3가지 질문의 시험)를 통과한 영화는 10편이고, 영화 홍보 포스터에 여성 등장인물이 아예 나오지 않은 영화가 20편이다. 미국에서는 캐릭터의 성별, 성정체성, 인종 등을 다양화하고 이들에게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부여하려는 히어로 코믹스와 히어로 무비의 흐름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이고 여성 작가나 제작자에게 성폭력을 포함한 사이버 불링(온라인 공간에서 이메일이나 휴대폰, SNS 등을 활용해 특정 대상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괴롭히는 행위)을 저지르는, 남성 ‘팬’들이 나타났다. 지난 달, 한 정당이 개최한 20대 남성 간담회에서는 “결혼이라는 생애사적 이유로 자발적으로 일을 그만둔 여성의 경력단절이 왜 성차별 문제인가” “어른들이 잘못한 가부장제의 악습을 20대인 우리가 왜 해결해야 하는가” 하는 발언이 나왔고, 한 일간지의 20대 남성 인터뷰에서는 “오히려 차별받았다. 초등학교 때 우유 당번 등 궂은일은 남자가 많이 했다”라는 말이 나와 많은 대중 여성의 공분을 샀다. 한편, 최근 여성가족부(여가부)가 배포한 「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서」에 포함된 “비슷한 외모의 출연자가 과도한 비율로 출연하지 않도록 한다”는 권고안(가이드라인)에 대해 한 남성 정치인은 군사독재 시절의 ‘검열’에 빗대며, “아이돌이 번 외화로 세금을 받아먹은 여가부가 국위선양 하는 아이돌을 죽이겠다는 발상을 했다”며 거세게 비난했고, 아이돌 팬덤을 중심으로 ‘여가부 폐지’ 청원이 일어나기도 했다.
《을들의 당나귀 귀》는 한국여성노동자회(한국여노)의 임윤옥, 김지혜 활동가와 페미니스트 문화연구자 손희정이 여러 대중문화 연구자들을 만나 대담한 동명의 팟캐스트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책은 TV 예능, 드라마, 케이팝, 영화, 소설, 게임, 인터넷 커뮤니티 등 다종다양한 분야를 가로지르며, 최근 우리의 ‘귀’를 쫑긋거리게 한 미디어와 대중문화 속 ‘성평등’ 이슈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커니즘을 캐낸다.
남녀 임금격차 OECD 국가 중 1위,
여성 노동자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
기준임금이 된 최저임금,
경력단절, 독박 가사·육아…….
30년 역사의 여성 단체와 페미니스트 문화연구자의 만남,
여성 노동운동이 팟캐스트가, 한 권의 책이 되기까지
1987년 창립한 한국여노는 가정과 일터, 사회에서 이뤄지는 모든 노동에서 성평등이 실현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매년 3000여 건의 노동 상담과 여성 노동 관련법 제정·개정 운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여노가 기획해 2015년 4월, 처음 방송한 팟캐스트 <을들의 당나귀 귀>는 언론에서 주목하지 않는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속 시원히 말하는 방송을 만들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2016년 시즌2부터는 ‘성평등 노동’ 편과 ‘대중문화와 젠더’ 편으로 나눠 제작해 왔고, 2018년까지 시즌1~4, 총 101차가 방송되었다. 곧 시즌5가 시작된다.
책 《을들의 당나귀 귀》는 2016, 2017년 두 해 동안 시즌2, 3에서 방송된 ‘대중문화와 젠더’(20여 편, 35여 회차) 편에서 가려 뽑은 내용을 단행본에 맞게 수정, 보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방송의 게스트였던 최지은, 허윤, 심혜경, 오수경, 오혜진, 김주희, 조혜영, 최태섭이 책의 저자로 참여해, 방송에서 전달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이해하기 쉽게 다듬었다. 각 글의 맨 뒤에는 최근의 경향을 덧붙여, 주제별, 분야별로 하나의 이슈가 드러내는 징후와 그 맥락이 어떻게 유지되고 확장되는지 살필 수 있도록 했다. 이들 페미니스트 활동가, 문화비평가, 대중문화 연구자들의 유쾌하면서도 핵심을 짚는 메시지는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대중문화 텍스트들을 페미니즘 관점으로 읽어 낼 수 있는 명쾌한 언어와 날카로운 감각을 제공한다. 이 여정은 답답하고 가려운 곳을 적확히 긁어 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약동하는 페미니즘 서사와 여성 연대의 가능성을 상기한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다. “이성애-결혼-출산-양육의 ‘정상가족’ 프레임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는 방송 프로그램, 엄마와 딸, 아내, 연애 상대 말고는 ‘주체’로서 상상되지 못하는 빈약한 여성 캐릭터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여성 혐오’ 텍스트에 지친” 독자들이라면, 누구라도 즐겁게 동행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들만 넘쳐 나던 세계를 평정한 ‘김숙’이라는 현상
예능 판에 대한 가능한 상상들
송은이 씨가 <택시>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숙이랑 나는 애하고 시어머니가 없어서 방송을 못한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30, 40대 여성 연예인들이 살림, 육아, 결혼을 둘러싼 갈등, ‘시월드’ 이야기, 이런 걸 풀어놓지 않으면 출연할 프로그램이 없다는 거예요.
_24쪽, “한남 엔터테인먼트”, 최지은의 말
2018년 ‘미투’ 운동이 전 사회로 확산되면서, <아빠를 부탁해>의 ‘딸바보’ 아빠들이 차례로 고발되었다. 이들은 가르치던 제자, 함께 공연한 배우에게 성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딸바보’ 가부장의 이미지가 여성을 소유하고 교환하는 구조의 알리바이로 작동하고 있음을 방증한 셈이다. 여전히 가족 예능 프로그램의 아버지들은 딸을 “내 진짜 애인”이라거나 “시집보내기 아깝다”고 말하며, 딸의 섹슈얼리티를 소유하려 든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간판 ‘딸바보’는 축구 선수로 바뀌었지만, ‘공주님처럼 예쁜 딸’과 보호자 아버지의 구도는 변함없이 반복된다. 아버지들은 5살 남자 아이에게도 ‘예쁜 여자는 친구와 경쟁해서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예쁜 여자아이를 두고 경쟁하는 ‘오빠들’의 삼각 구도는 대물림되며 강화된다. 결국 가족 예능에서 ‘딸’은 독립된 주체로 상상되지 못하며, 인간이라기보다 그저 ‘여자’로만 남게 된다.
_107쪽, “‘딸바보’ 시대의 여성 혐오”, 허윤의 말
한국의 예능 판은 남성 중심적이다.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최지은은 이를 “한남 엔터테인먼트” “아재 엔터테인먼트”라고 명명하면서, 여성 예능인에게는 잣대가 가혹하고 기회조차 드물지만, 남성 예능인에게는 관대하고 기회가 많은 남성 중심적인 예능 산업을 분석한다. 또 그 기회를 누린 남성 예능인이 영향력 있는 중년으로 성장하면서 그들 라인을 중심으로 판이 짜이고, 이것이 ‘아재’ 문화와 ‘가부장’ 서사의 주류화로 이어지는 구조를 지적한다.
문학연구자인 허윤은 그중 가족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 등에 나타난 ‘딸바보 아버지’ 서사에 집중한다. 영유아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딸을 둔 아버지들이 하나같이 딸바보 이미지를 방송 자산으로 가져가면서 어떤 방식으로 이면의 여성 혐오를 드러내고, 급기야 ‘#미투’ 운동의 가해자 목록에 자기 이름을 올리게 되는지를 따라간다.
영화연구자 심혜경은 ‘갓숙’ ‘가모장’ ‘숙크러시’ ‘퓨리오숙’ 등, 단기간에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면서 팬덤을 형성한 코미디언 김숙을 하나의 ‘현상’이라고 추켜세우면서, 남성 중심의 예능 판을 뛰어넘기 위해 김숙과 송은이가 시작한 ‘비보TV’의 성공과 그 활약상을 조명한다.
걸그룹, 혁명가, 공장노동자, 성매매 여성…….
여성의 노동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실제로 당대 여성들은 남성 사회주의자와의 결혼을 통해 운동 지형 내에서 자신의 입지와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거든요. 오히려 ‘진짜’ 혁명가인지 아니면 단지 ‘아지트키퍼’에 불과한지를 끊임없이 구분하고 싶어 하는 욕망은 여성 혁명가에게만 적용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여기에는 ‘여성은 정치적 이념의 주체가 될 수 없다’라는 고정관념이 전제돼 있어요. 예컨대 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