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주 드 프랑스의
전설이 된 강의”
- 시간의 본모습, ‘지속’으로 서양철학사를 반성하다
프랑스 지성계의 자랑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는 베르그송의 강의와 관련된 전설적인 이야기가 오늘날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강의에는 유명하고 뛰어난 학자와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반인들도 입추의 여지가 없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강의실에 들어서는 데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창밖에서 베르그송의 강의를 듣기 위해 애쓰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지금도 전해져 올 정도로 말이다. 삶에 치이고 쫓기며 숨 가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의 철학에 대해 무엇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며, 왜 그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철학적 진리의 열쇠,
세계 근본 형식으로서의 시간
철학이란 어려운 것이다. 말로는 세계의 근본적인 진리를 추구한다고 내세우고 있지만,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기란 어렵다. 다시 말해, 무엇을 묻고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야 세계의 어느 한 귀퉁이만 건드리는 사소하고 한시적인 문제에 매달리는 것을 벗어나, 가장 근본적인 진리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철학을 어려운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을 물어야만 이 근본적인 진리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지의 문제부터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을 탐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 분명치 않은 문제를 헤쳐 나갈 수 있게 되는 한 가지 방법이 되어 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피할 수 없이 적용되므로, 우주의 모든 것이 펼쳐지는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형식이다. 이 근본 형식이 품고 있는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철학이 소망하는 근본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시간은 공간이 아니다
시간의 본모습 ‘지속’
베르그송이 철학사상 불멸의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그가 시간에 대해 매우 혁신적인 생각을 제시하고 있으며, 또한 이를 통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멍들게 했던 수많은 난제들을 성공리에 해결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대체 무엇이지, 세계와 우리 삶의 참모습을 밝혀낼 수 있는 비밀이 시간이 공간과 다르게 존재한다는 점에 있다는 것 등이 베르그송이 이 강의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베르그송은 자신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정리했다. “나는 시간이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공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르그송은 시간이 지성의 논리에 의해 우리 주관의 요구에 맞게 휘어지게 된 것을 ‘공간화된 시간’이라고 부른다. 우리 지성이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실은 시간의 본모습이 아닌 공간이라는 것이다. 반면 공간화된 시간의 모습에서 벗어난 시간의 본모습, 과거-현재-미래라는 관념을 비롯해 모든 종류의 개념적 표상을 거부하고 직관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의 본성을‘지속’이라 부른다. 공간이 아닌 시간, 『시간에 대한 이해의 역사』는 시간의 본모습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그는 시간의 본모습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통찰을 통해 시간에 대한 이해의 역사를 반성하고, 이러한 반성을 통해 시간에 대한 자신의 이 새로운 통찰에 정당성을 보여 주려 한 것이다.
시간의 본모습을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삶을 살아가는 자세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적어도 베르그송에게는 자유와 필연의 문제, 의식과 몸, 기억과 두뇌의 문제, 무의식과 의식의 문제 등 인간의 실존적 조건과 관련되는 문제들이 결국에는 모두 시간의 문제로 수렴된다. 또한 생명 진화의 수수께끼나 우주 전체와 우리 인간 자신의 존재 이유 등의 궁극적인 문제 역시 이 시간의 문제로부터 출발하여 그 진정한 이해의 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플라톤이나 칸트와 더불어 2500여 년의 세월을 헤아리는 서양철학사 속에서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이와 같은 깊은 울림 때문일 것이다.
‘지속’으로 펼쳐내는
서양철학사의 독창적 해석
베르그송은 서양 고대 철학의 사유와 서양 근대 철학 사유의 핵심적인 특징을 시간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매우 일목요연하게 그려 내고 있다. 물론 베르그송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독창적인 사유를 담고 있는 저술들을 통해 자신의 놀라운 천재성을 보여 주었지만, 서양철학사라는 장대한 사유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어 나왔는지를 단 몇 개의 결정적인 혈맥을 짚어 내어 생생하게 재현하는 듯한 이 강의에서도 그의 놀라운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주고 있다. 베르그송이 시간에 대한 이해의 역사를 추적하기 위해 이 강의에서 다루고 있는 각 철학자들의 사상이란 저마다가 엄청난 내공과 깊이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베르그송은 각자가 우리의 시야를 완전히 뒤덮을 만큼 엄청나게 거대하고 복잡한 내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 사상들 하나하나의 내적 완결성을 훌륭히 그려 낸 것을 넘어, 시간에 대한 그 자신의 새로운 이해를 통해서만 그 정체성과 방향을 제대로 규명할 수 있게 되는 더 큰 사상적 흐름 속의 일부가 되어 들어오도록 이것들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 짓는 데 성공하고 있다. 즉 이 사상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베르그송이 진단하고 있는 이 사상적 흐름의 맥락 속에 놓이게 될 때 더욱 선명하게 우리에게 드러나게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가 깊은 독창적인 사유의 능력을 지니는 것과 함께 많은 철학사 문헌에 대한 광대하고 조직적인 식견을 겸비할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시간의 문제란 꼭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닌 보통의 일반인들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일 것이다. 철학은 다분히 어려운 것이지만, 베르그송은 언제나 그렇듯이 이 강의록에서도 그 명료하고 생동감 넘치는 사유와 언어의 힘으로, 철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진입장벽을 크게 낮추어 주고 있다. 시간에 대한 막연한 철학적 의구심뿐만 아니라 베르그송의 사상과 그의 서양철학사에 대한 독창적 해석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이 그 요구를 섬세하게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