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1. 2013년 2월 27일 95세로 타계한 스테판 에셀이 모든 세대에게 전하는 유언! 레지스탕스의 일원이자 ‘분노한 사람들’(Indignados, 인디그나도스) 운동을 예고한 연로한 투사는 자신의 뒤에 아름답고 풍요로웠던 긴 생애를 남기고 2013년 2월 27일 새벽, 파리에서 숨졌다. 향년 95세였다. 30개의 언어로 번역되고, 거의 100여 개의 나라에서 출판되어 프랑스에서 3백만 권, 스페인에서 50만 권 정도가 팔리는 등 세계적으로 4백만 권 이상이 팔린 스테판 에셀의 책 『분노하라』는 출판계의 이슈가 되는 것을 넘어서 범세계적인 정치 현상으로 나타났다. 전 세계의 다른 유사한 운동을 이어받아 2011년 5월에 일어난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인디그나도스) 운동은 삶의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내려고 에셀이 얼마나 애써왔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때부터, 미국에서 한국에 이르기까지 지구 곳곳에서 시민단체와 사회운동가들은 그의 의견을 구했다. 스페인에서 사회적 불만으로 표출되었던 ‘분노한 사람들’ 운동에 이름을 준 스테판 에셀은 영면하기 얼마 전에 현대 사회의 도덕재무장을 긴급히 요구하는 정치적 유작 『포기하지 마라』를 남겼다. 에셀이 스페인을 포함한 세계의 독자들을 위해 생각하고 쓴 책이었다. 이 책은 지난 2012년 12월 말부터 2013년 2월 에셀이 눈을 감기 직전까지 스페인의 유력 일간지 《라 방구아르디아》 파리 특파원이자 작가인 유이스 우리아와의 대화를 통해 정리된 것이다. 1년 전 프랑스 주간지 《파리마치》에 나온 인터뷰에서 발레리 트리에르바일레르――《파리마치》 기자이자 프랑스의 퍼스트레이디――는 스테판 에셀에게 다음 계획이 무엇인지 질문했다. “죽는 것을, 그것도 곧 죽는 것을 희망합니다.”라고 허심탄회하게 그는 대답했다. 돌발적인 말이 아니었다. 스테판 에셀은 이제 알맞은 시간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종종 말해왔던 것처럼, 죽음은 결국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영면하기 얼마 전에 끝마친 이 책은 그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다. 스테판 에셀은 항상 투사였다.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된 『포기하지 마라』를 기획 출간한 유이스 우리아는 에셀이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그와 함께 했다. 유이스 우리아는 스테판 에셀의 마지막을 다음처럼 회상한다. “사랑이나 고통 등 삶이 그에게 주었던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아왔던 모든 것에 만족하며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마지막 여정을 떠났다. 그가 좋아했던 시 속에 나오는 것처럼, ‘행복한 여행’을 했던 것에 만족해하며 떠나갔다.” 2. “굴복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 세상을 향해 보내는 스테판 에셀의 마지막 메시지 『분노하라』라는 작은 책이 세계의 시민들과 국제 시민사회운동에 던진 영향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 어떤 선동가라 하더라도 전 세계인들을 그토록 짧은 시간 내에, 그토록 열정적으로 동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책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페인에서는 국제금융 위기의 여파로 실업자가 양산되고, 젊은이들이 갈 곳 없이 헤매는 암울한 상황이 닥쳤다. 스페인의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항의의 표시로 광장을 점거하고 장기농성에 들어갔던 일단의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분노한 사람들(Los Indignados)’이라고 호칭하였다. 에셀의 메시지에 즉각 호응한 것이었다. 에셀의 외침은 그리스에서도, 영국에서도, 칠레에서도, 이스라엘에서도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이들이 분노한 구체적인 내용은 나라마다 약간씩 달랐지만 인권과 인간 존엄성과 세계시민의 연대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으로 에셀의 메시지를 수용하고 있었다. 프랑스와 미국, 그리스와 스페인 그리고 아랍의 젊은이들을 거리로 결집시키는 데 영감을 준 에셀은 그의 마지막 유언이자, 유작이 되어버린 『포기하지 마라』를 통해, “오늘날 오만한 돈의 힘과 시장 독재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그 모든 것에 대해 봉기하고 싸울 것을 요구하며 또한 “변화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소수독점 지배세력을 거부한다는 우리의 의사는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경제와 정치에 대한 의욕적인 비전을 제시해야만 한다. 항의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행동해야만 된다.”고 외친다. 그는 잔혹했던 20세기를 온전히 체험했던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충고한다. “민주주의는 목적이다. 그러나 또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현재의 위기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고통은 공포와 증오를 격화시키고 있다. 극단주의가 우리에게 잠복해 있다. 그러나 혁명의 길이나 전체주의 사상으로는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다. 혁명은 결국 전체주의를 부른다.” 그리고 정치에 대한 관심을 회복시킨다. “정치에 대한 욕구를 회복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정치 없이는 진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동일한 의미에서 그리고 오늘날 정당과 정치인들이 겪는 신뢰의 위기 앞에서 그는 “전통적인 정당들은 그 자체로 너무 닫혀 있다.”고 말하며, “경직되어 있기에 뒤흔들 필요성이 있다.”고 충고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정치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정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정치 참여를 위한 근본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목표하는 바를 위하여, 우리의 용기와 야망의 이름으로 정치, 정부, 사회 조직에 스며들어야만 한다.” 책 집필을 계획했을 당시 스테판 에셀은 여느 때처럼 ‘포기하지 마라’라는 명령적이면서도 단호한 제목을 사용했다.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테판 에셀은 세상에 대한 마지막 참여로, 감사의 마음으로――또는 이 두 가지 모두로――도전을 받아들였다. 아마도 이번 책이 자신의 정치적 · 지적 유언이 될 것을 의식하였으리라. 3. “행복하여라, 율리시즈처럼 멋진 항해를 한 사람은.”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스테판 에셀(조효제) 2013년 2월 27일 수요일, 파리의 바스티유 광장에 수백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던 역사적 자리에 모인 이들은 한 노인의 사진을 앞에 두고 촛불을 켜고 명복을 비는 의식을 가졌다. 엄숙한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발랄한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초 한 자루씩을 바치는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그날 새벽 세상을 떠난 스테판 에셀을 추모하는 자리였다. 같은 시간 유엔인권이사회의 회의장에 모인 세계 각국 대표들은 회의를 시작하기 전 일제히 기립하여 1분간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국제 인권운동의 거인을 잃었다는 의장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유엔인권이사회 역사상 타계한 개인을 위해 공식적으로 묵념행사를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인물, 레지스탕스의 화신을 잃었다”고 애도하면서 “모든 세대에게 영감의 원천이자 기준”이 되었던 에셀의 생애를 기렸다. 페이스북에 오픈된 ‘스테판 에셀을 위한 백만인 조문록’은 순식간에 채워졌다. 수요일 하루 종일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미국의 트위터에서 제일 많이 회자된 이름도 ‘스테판 에셀’이었다. 독일의 잡지 《디 자이트》지는 에셀을 ‘전 세계 민주화의 사상적 대부’라고 칭하면서, ‘아랍의 봄’으로부터 ‘월가를 점령하라’ 캠페인에서 보듯 전 세계인들이 그가 주창한 비폭력 저항사상에 즉각적으로 반응했었다고 보도했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언론들은 일제히 장문의 부고기사를 내보내며 그의 일생을 자세히 보도했다. 기사의 깊이나 분량으로 보아 거의 최고 수준의 예우였다.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라프》와 같은 보수언론에서도 장문의 부고기사를 통해 그의 생애를 아주 자세히 다룰 정도로 이례적인 보도가 이어졌다. 추모의 물결은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프랑스의 역사적 위인들이 안치되는 국립묘지 팡테옹에 에셀을 모시자는 시민들의 청원 캠페인이 즉시 시작되었다. 캠페인 청원서는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