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책은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 셸던 월린Sheldon Wolin(1922~ )의 대표적인 저서 Politics and Vision: Continuity and Innovation in Western Political Thought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애초 <정치와 비전>은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1960년에 출간된 바 있다. 그러나 40여 년 후 저자는 7개 장을 새롭게 추가해 2004년에 76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으로 새롭게 출간한 바 있다. <정치와 비전>의 우리말 번역에는 7명의 역자들이 참여했으며, 3권으로 분권되어 그간 초판에 해당하는 <정치와 비전 1>(2007년, 강정인/공진성/이지윤 옮김), <정치와 비전 2>(2009년, 강정인/이지윤 옮김)로 출간된 바 있으며, 이번에 출간된 <정치와 비전 3>(강정인/김용찬/박동천/이지윤/장동진/홍태영 옮김)은 새롭게 추가된 7개 장의 내용을 담고 있다.
2.
“이 책에서 나는 정치철학의 지속적이고 변화하는 관심의 일단을 서술하고 분석하고자 시도했다. 오늘날 많은 지식인 집단 사이에서 전통적인 형태의 정치철학에 대한 강한 적대감, 심지어 경멸감마저 존재하고 있다. 내 희망은 이 책이 비록 정치철학 전통에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을 기꺼이 내던지고자 하는 자들을 제지하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내버리려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_ 초판 서문 중.
<정치와 비전>은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의미라는 일관된 관점 아래에서, 그 개념들이 처음 등장한 고대 아테네를 기점으로, 서구 정치사상사 속에서 어떻게 그 개념이 지속되고, 혁신되었는지를 주요 시기와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이 점에서 <정치와 비전>의 전반적인 문제의식과 책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개념은 ‘정치적인 것’의 의미라 할 수 있는데, 다소 거칠게나마 이를 소개하자면, 월린에게 정치 혹은 정치적인 것은 ‘공적인’, ‘공통적인’, ‘일반적인’이라는 단어들과 공명하는 것으로, 정치철학의 고유한 대상이 되는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보다도 공동체 구성원 간의 차이를 정당화하고 화해시키며, 공통성communality을 유지/보존하는 일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는 공공선이 무엇인지를 모색하고 찾아 나서는 구성원 전체의 노력을 의미하기도 했는데, 이 점에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월린의 개념화는 정치사회라는 공동체와 관련된 고유한 힘, 이득, 위험, 희생이 그 구성원들 사이에서 평등하게 공유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와 매우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한편으로, 이와 같은 관점의 의미는 이 책이 처음 출간된 당시의 이론적/지적 풍토 속에서 좀 더 명확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1960년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는 행태주의 혁명이 그 정점으로 치닫고 있던 시기이자, 이에 따라 정치학이 그 독자적인 성격을 상실한 채 사회적인 것(예컨대 합리적 개인들의 행동 패턴 혹은 이익집단들과 경제적 이해관계의 단순한 반영으로 환원되는 정치학)으로 환원되고, 이에 따라 정치철학의 죽음이 널리 회자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민주주의를 공공선의 증진이나, 공적인 것에 대한 공동의 모색과 참여가 아니라, 정치권력을 둘러싼 통치 엘리트들 사이의 경쟁으로 축소시켰던 것이 당시의 지배적인 경향이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지적 풍토와 이론적 경향에 맞서 과연 우리가 내던져 버리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장차 초래할 결과가 무엇인지를 모색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구의 지성사를 ‘정치적인 것’의 등장과 쇠락이라는 문제 의식하에 일관되게 저술했던 것이다. 하지만 40여 년 전의 시대적인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으며, 월린이 당시에 가졌던 문제의식은 축소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와 같은 저자의 문제의식은 정치를 비합리적이며, 비효율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가능한 이를 축소하거나, 회피해야 하는, 적절히 관리하고 규제해야 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월린은 2004년에 새롭게 증보된 장들을 통해 정치의 고유성을 부정하고 이를 이윤 극대화의 원칙과 효율성의 논리로 축소(다운사이징)하려는 신자유주의적 접근들과 이에 대한 맞짝으로 정치적인 것을 올바른 삶, 윤리적이고 규범적인 진리에 대한 추구로 환원하며 이를 엘리트들의 고유한 몫으로 돌리는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를 위시한 신보수주의 정치철학에 대해 도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정치와 비전>이 출간된 이래로, 월린이 제시하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은 다소 모호한 것으로, 다시 말해 ‘공적인 것’, ‘공통성’ 등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추가적인 규명이 좀 더 명료하게 이루어져야 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있어 왔다. 나아가 오늘날의 탈근대 이론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와 같은 개념화는 다소 진부하며,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분리 불가능성, ‘공적인 것’의 상대성과 공허성, 그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대해 갈파하고 있는 오늘날의 포스트모던한 이론 정세에 비추어 본다면 말이다. 사실 이와 같은 지적은 월린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정치철학이 직면하고 있는 주요 과제이자 <정치와 비전>이 대결하려는 주요 주제가 바로 “정치적인 것에 대한 명확한 관념을 보존하는 작업의 어려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대 플라톤에서 현대의 전도된 전체주의에 이르기까지 서구 지성사에서 제기되었던 ‘정치적인 것’과 ‘민주주의’의 비전에 대한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와 비전>은 오늘날 우리에게 새롭게 필요한, 새롭게 상상되고 발명되어야 하는 ‘정치적인 것’과 ‘민주주의’에 대한 비전 및 그 혁신의 내용은 무엇인지에 대한 주요한 이론적 자원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초판의 부제는 40년 전의 세계관을 매우 잘 요약하고 있는데, 그 부제에서 정치와 이론의 매개변수는 ‘지속’과 ‘혁신’으로 설정되었다. 근대의 기업에 초점을 맞춘 제10장을 제외하고, 이전 장들은 현재를 분석하기보다는 과거를 해석하는 데 일차적인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제 새롭게 추가된 장들은 그런 해석을 부정하기보다는 그런 해석들을 현대의 정치 세계에 집적 적용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증보판과 초판을 통일시키는 기본적인 신념은 만약 우리가 우리 시대의 정치에 제대로 대처하고자 한다면 과거 이론에 대한 비판적인 지식이 우리의 사유를 예리하게 하고 우리의 감수성을 키우는 데 비할 바 없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내 희망은 현재의 작업이 어느 정도 새로운 세대의 정치 이론가들에게 정치적인 것의 재정의와 민주정치의 재활성화라는 끝없는 작업에 매진하도록 고무하는 것이다.”
3.
<정치와 비전>은 그 첫 출간 시점이 근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사상사 관련 서적들 가운데 오늘날 가장 적실성을 가질 수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간 국내에 소개된 정치사상서로는 조지 세이빈George Sabine의 <정치사상사>와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의 <서양 정치철학사>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데, 세이빈의 책은 사상가들의 주요 사상과 이론적 개념들을 적절히 요약하면서 소개하기 때문에 입문자들이 서양 정치사상사를 처음으로 접하고 이해하기는 수월하지만, 오늘날의 다양한 쟁점들이나 관점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나아가 영미 편향적이라 독일 사상가들(헤겔, 마르크스 등)에 대한 소개는 다소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으며, 때로 반공주의적 시각이 짙게 배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스트라우스의 책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그의 책에는 보수주의적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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