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카는 무감각에 시달린다. 항상 상대적인 까닭에 하찮은 모든 행위의 의미는 죽지 않는 그의 시선 아래에서 녹아버린다. 야망, 희망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계속되는 사랑들은 뒤섞여버린다. 그의 우정들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만한 생기 있고 특별한 공감이 없어서 죽어버린다. 시간적 한계를 상실함으로써 그의 실존은 인간성을 잃는다. 특권처럼 보이던 불멸성은 저주임이 드러난다. 그 때문에 그는 영원히 인간적 조건 밖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죽음을 마주하기에, 인간은 살아간다
이 책은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인 시몬 드 보부아르의 세 번째 소설 작품『모든 인간은 죽는다Tous les Hommes Sont Mortels』(1946년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 간행)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영원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과, 좌절을 거듭하는 인간의 이상주의를 치열하게 묘사하면서, 유한한 생명의 의미를 묻고, 쳇바퀴처럼 반복되면서도 아주 느리게 전진하는 역사를 되비치는 소설이다.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산다. 혹은 애써 잊고 산다. 작가는 ‘죽음’이라는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지금 살고 있는 나의 삶, 우리의 삶, 대대로 목숨을 이어온 인류 역사의 의미를 격랑처럼 펼쳐 보인다.
현대의 새로운 인간형을 개척하며 온몸으로 ‘진보’를 실험해온 보부아르의 작품들은 1970년대부터 국내에 번역 출간되어왔다.『제2의 성』과『노년』,『아주 편안한 죽음』(두 군데 출판사에서 각각 ‘죽음의 춤’과 ‘편안한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한국어판을 시중에서 구할 수 있다) 외에 자전적 소설과 에세이 여러 권이 출간되었으나, 오늘날 보부아르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흔히,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한’ 자유 여성(방종한 여자?) 정도에 그친다. 그 사상의 깊이와 유장한 필력을 담은 이 책,『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오랫동안 한국인의 기억 저편에 묻혀 있었다. ‘人間은 모두가 죽는다’라는 제목으로 1979년(수문서관)과 1986년(풍림출판),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제목으로 1990년(학원사)에서 출간된 바 있지만 모두 절판된 상태다. 이제 도서출판 삼인에서 2014년의 감각과 문체로 새 번역판을 내놓는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주어진 여건과 관습에 따라 기계처럼 존재하고 작동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을 투신하여 주어진 한계를 초월함으로써 존엄한 개인으로서 ‘실존’하려는 인간의 투쟁을 긴 호흡으로 그려낸, 실존주의의 문학적 형상화다. 작가는 이 작품을 평생의 동반자였던 실존주의 사상가 장폴 사르트르에게 헌정했다.
촉망받는 여배우 레진은 지방 공연을 다니던 중 머무르던 호텔에서, 언제나 정원의 긴 의자에 누워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늘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난다. 세상을 등진 듯한 이 남자에게 호기심을 품은 레진은 그를 일깨워 평범한 생활인으로 만들어보려고 한다. 남자는 레진의 노력에 반응을 보인다. 남자의 이름은 레몽 포스카. 죽지 못하는 저주를 받은 남자. 포스카의 비밀을 알게 된 레진은 영원한 시간 앞에서 너무도 하찮아 보이는 자신의 존재에 절망하고, 자신의 실존을 파괴적으로 증명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레진이 더 망가지지 않도록 포스카는 그녀를 떠나려 한다. 자신을 붙잡는 레진에게 그는 긴 이야기를 들려준다.
포스카는 1279년 이탈리아의 공작령 도시인 카르모나에서 귀족으로 태어났다. 정정은 불안했다. 1311년, 포스카는 마침내 정적들을 물리치고 카르모나의 군주가 된다. 그는 카르모나의 번영과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그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한정된 자신의 행동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고, 자신이 이뤄낸 업적은 예기치 못한 천재지변과 외세의 영향으로 변질되어버린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그는 (알려진) 세계 전체로 발판을 넓혀야만 자신의 노력이 의미 있는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는 데 인간의 수명은 너무 짧았다. 그래서 불사의 영약을 마실 기회가 주어지자, 포스카는 망설이지 않는다.
포스카의 야망은 느리지만 냉혹하게 부서져간다. 인간이 모험하고, 정복하고, 파괴하고, 건설하고, 또 파괴하고, 다시 또 건설하면서 걸어온 700여 년의 역사와 함께. 그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끔 지배하고자 하는 ‘선의’를 품고, 자신의 선의에 만인이 복종하기를 바랐지만, 순교자들은 이런 말을 남기며 화형대로 걸어간다.
“오직 한 가지 선(善)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는 제국을 이끌었으나 제국은 단 한 번도 통일되지 않았고, 아메리카 식민지를 발판으로 완벽한 세계를 건설해나가려 했으나 다만 식민지에서 아름답고 온전했던 한 세계를 파괴했을 따름이다. 혁명이 되풀이 시도되고 되풀이 좌절된다. 사랑은 시간 앞에서 스러져간다. 그의 옆에서 사람들은 죽고, 역사는 거의 제자리에서 도는 쳇바퀴처럼 아주 느리고 무겁게 굴러간다. 오늘의 투쟁에 헌신하고 오늘의 승리를 즐기기에 그의 시간은 너무 길다…….
보부아르는 이 소설에서,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로 꼽을 수 있는 죽음의 문제를 심도 있게 제기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적 조건 중 하나가 분명 죽음이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선고(宣告)를 받은 것과 같은 말이다. 하이데거의 표현대로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다. 인간은 자신이 필멸할 존재라는 사실로 인해 종종 절망한다. 하지만 인간은 유한성이라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실존적 조건에 굴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불가능한 시도를 하기도 한다. 요컨대 인간은 불멸하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과연 불멸하는 존재가 된 인간은 마냥 행복할까? 반대로,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마냥 불행할까? 인간은 죽음이라는 ‘매듭’이 지어지는 삶을 영위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삶에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인간은 필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자신에게 삶의 매 순간이 유일하며 절대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통해 독자들도 이를 고민해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