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주인이 되고 독자가 친구가 되는 문학동네시인선
050을 맞아 기념 자선 시집을 펴냅니다!
‘보다 젊은 감각과 보다 깊은 사유를 지향한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지난 2011년 1월에 새롭게 시작한 문학동네시인선이 벌써 50권째를 맞았습니다. 시가 죽었느니 시집은 망하는 지름길이니 그럼에도 무수히 많은 시인들은 왜 쏟아지는지 의문에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는 이 시점에 100호 기념도 아니고 그 반 토막인 50호를 맞아 이 소박한 기획을 벌이게 된 것은, 그럼에도 시 읽는 독자를 한 명이라도 더 끌어들여보자, 하는 간절하면서도 간곡한 바람에서였습니다.
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종종 사람들에게 물을 때면 돌아오는 대답이 거의 흡사합니다. 시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시요? 왜 읽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시요? 읽어야 할 자기계발서도 넘쳐나는걸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상했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사는 삶이, 우리를 살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어쩌면 시집 속 시 한 편 시 한 구절 속에 숨어 있을 수도 있는데,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보다 행복하고 보다 아름다운 순간순간으로 기억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 그걸 모르고 눈앞에서 놓치다니! 감히 자부하건대 그 비밀을 남들보다 조금 일찌감치 깨우쳤다 할 수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 시집을 기획하게 된 연유는, 시로 인해 얻을 수 있는 특혜를 좀더 많은 독자들이 누렸으면 하는 절박한 소망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문학동네시인선이 50권째를 맞아 펴낸 기념 자선 시집 『영원한 귓속말』은 말 그대로 시인들이 직접 나서서 한데 목소리를 모았다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여타의 출판사들이 펴낸 시선집의 경우 편집위원이나 평론가 들이 시를 모으고 평론을 붙임으로써 그 축제의 장에 그네들이 주인이자 주체가 된 적이 대부분이었거든요. 문학동네시인선이 그 포문을 열 때 가장 중요하게 염두에 둔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 시인들이 주인이 되어야 하고 독자들이 그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시가 문학을 하고 문학을 아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저 먼 우주의 것이 아니라 내 손에 있고 내 심장에 있고 내 삶에 있다는 것, 그것을 다수의 독자들에게 알게끔 해주자. 그 목표를 가장 으뜸으로 삼은 까닭이었습니다.
시가 그토록 대단한가. 그렇다면 시는, 있으면 좋은 것인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인가. 소설과 영화와 음악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면 시 역시 그렇다. 그러나 언어는 문학의 매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매체다. 언어가 눈에 띄게 거칠어지거나 진부해지면 삶은 눈에 잘 안 띄게 그와 비슷해진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들이 계속 시를 쓰고 읽을 것이다. 시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시가 없으면 안 된다고 믿는 바로 그 마음은, 없으면 안 된다.
그간 이 시인선을 기획해온 이들은 문학동네시인선이 지난 삼 년 동안 문단 동료들과 시집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했는지 반성하는 와중에 중요한 사실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중 하나는 한국의 시가 아직 가지 않은 길이 많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집이 시보다 먼저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 알쏭달쏭한 말의 의미를 앞으로 출간될 시집들이 밝혀 보여줄 것이다. 그러니 (보들레르의 「여행」 풍으로) 시여, 젊은 선장이여, 때가 되었다, 닻을 올리자!
_「펴내며」, 문학동네시인선 기획위원의 말 중에서
『영원한 귓속말』은 지금까지 문학동네시인선을 통해 선을 보인 49명의 시인들이 제 시집에서 저 자신이 이거다 싶은 한 편의 시를 직접 고르게 했고, ‘시인의 말’과는 별개로 시와 시집에 붙이고 싶은 산문을 덧대었습니다. 일일이 다 열거하자면 최승호, 허수경, 송재학, 김언희, 조인호, 이홍섭, 정한아, 성미정, 김안, 조동범, 장이지, 윤진화, 천서봉, 김형술, 장석남, 임현정, 김병호, 이은규, 김경후, 안도현, 김륭, 함기석, 이현승, 서대경, 장대송, 김이강, 조말선, 박연준, 신동옥, 이승희, 곽은영, 박준, 박지웅, 김승희, 서상영, 장옥관, 김충규, 오은, 이사라, 윤성학, 박상수, 고형렬, 리산, 손월언, 윤성택, 조영석, 이향, 윤제림, 박태일 시인이 그 주인공이라 할 수 있지요.
어떤 이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산문을 쓰기도 했고, 어떤 시인은 일기에서처럼 시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기도 했으며, 또 어떤 시인은 연륜에 걸맞게 시론을 제시해주기도 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개성이 제각각으로 드러나는 시와 산문을 엮어내어 우리 시의 다양성과 우리 시인들의 폭넓은 상상력을 자랑스레 선보이게 된 점이 이 책이 가질 수 있는 큰 미덕 가운데 하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컨대 이런 식의 구성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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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_문학동네시인선 032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자선시 「꾀병」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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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오랜만에 나타난 당신이 하도 반가워서, 꿈속 당신에게 내 볼을 꼬집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당신이 웃으며 내 볼을 손으로 세게 꼬집었다. 하지만 어쩐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꿈속에서 지금이 꿈인 것을 깨닫고 엉엉 울었다. 그런 나를 당신은 말없이 안아주었다. 힘껏 눈물을 흘리고 깨어났을 때에는 아침빛이 나의 몸 위로 내리고 있었다. 당신처럼 희고 마른 빛이었다.
_문학동네시인선 032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덧글 「희고 마른 빛」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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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할 때 코를 문지르는 사람이 있다 난생처음 키스를 하고 난 뒤 딸꾹질하는 여학생도 있다 // 비언어적 누설이다 // 겹겹 밀봉해도 새어나오는 김치 냄새처럼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것, 몸이 흘리는 말이다 // 누이가 쑤셔박은 농짝 뒤 어둠, 이사할 때 끌려나온 무명천에 핀 검붉은 꽃//몽정한 아들 팬티를 쪼그리고 앉아 손빨래하는 어머니의 차가운 손등 // 개꼬리는 맹렬히 흔들리고 있다 // 핏물 노을 밭에서 흔들리는 / 수크령 // 대지가 흘러내리는 비언어적 누설이다
_문학동네시인선 036 장옥관 시집 그 겨울 나는 북벽에 살았다 자선시 「붉은 꽃」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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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하는 말이지만, 시는 생물이다. 그렇다는 건, 시가 리듬을 숙주로 삼기 때문이다. 무릇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리듬을 가진다. 시가 말랑말랑해지려면 오로지 몸의 들숨과 날숨에 기대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들림’ 상태를 뜻한다. 작두날 위에 올라간 무당처럼, 백양나무 우듬지에 올라앉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