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과 자본 사이에서, 한 뼘 깊이의 호의와 변덕 속에서
피폐해가는 영혼을 논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우리는 너무 많이 먹고 너무 적게 질문하지 않는가
철학자 김영민의 전작 <집중과 영혼>이 ‘집중’과 ‘열중’을 분별하면서 ‘존재론적 겸허’를 갖춘 집중에서 피어나는 영혼을 논했다면, 이 책은 자본과 자본 사이에서 봄날 아지랑이의 꼬리만큼도 못 피어나는 이 시대 사람들의 영혼을 탐색한다. 자본주의 속에서의 영혼이라면 초등학생 줄리엣과 초등학생 로미오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는 한 뼘 깊이의 호의와 변덕 속에 자리할 것이다.
이 책은 매체와 체계를 비판적으로 탐색하면서 이명박 시대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소비자로서의 인간을 탐색하고, 자본주의의 미학이 개입된 얼굴들을 각 개인의 아이덴티티로서 성찰하며, 장자연의 죽음에 대해 누구나 왁달박달해야 하는 이유, 노무현의 죽음으로 인해 김대중의 역사적 공과가 함입되는 왜곡, 용서와 고백의 실체 등에 대해 논한다.
‘성장, 더 성장, 또 성장, 새로운 성장’의 위세 속에서 인간들은 소비하는 데 정신없어 질문하기를 잊어버렸다. 버지니아 울프나 시몬 베유는 “적게 먹고 질문은 많이 하라”고 했지만, 우리는 많이 먹고 질문은 거의 하지 않는다. 자기를 성장시키는 방편으로 롤모델을 찾아 ‘파리’처럼 날아다니지만 오래지 않아 보상을 받길 바라며 매사 다음 건수를 준비한다. 이로써 스스로를 피폐하게 만드는 우리는 ‘자신보다 더 큰 자신’에게 문을 열어줄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지만 그런 개인들이라 해도 각자의 세월을 겪고 행위를 거치면서 제 얼굴을 통해 여정을 드러낼 터이다. 특히 어떤 얼굴들은 웅숭깊은 장소로 화하며 삶의 여정을 헛되이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인문학으로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이들의 얼굴을 살피기도 하고, 그들이 잠깐 피었다 결국 떨어져나가는 모습도 지켜보며, 마침내 자기를 깎는 속에서 여렵사리 피어나는 영혼도 들여다볼 것이다.
당신은 ‘일부 몰지각한 사람’이 아닌가
오늘날 갖은 대중매체를 통해 접하는 소식들은 대체로 상투적인 틀과 표현 속에 묶여 있다. 진실을 보도한다는 뉴스가 대표적인 사례인데, 뉴스는 진실의 외곽만 두들길 뿐 상투화된 표현 속에서 오히려 진실을 더 공고히 숨기고 있다. 포맷이 ‘대중’에 초점 맞춰져 있는 한 아무리 대사회적 가치를 의도한다 해도 그것은 보수적 움직임을 뒷받침하는 외피가 되기 십상이다.
이를테면 ‘일부 몰지각한 의사들이 리베이트를 받는다’는 보도가 나올 때 특권적 지식인층에 성공적으로 반란反亂해온 대중은 자신들만은 결코 ‘일부 몰지각한 이들’에 속하지 않는다는 양심을 꼭 붙들어 안고 있다. 우스갯소리로 ‘당신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하는 것처럼 이 같은 총체적 허위의식의 단면을 대중은 붙들어놓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일부 몰지각한 시민들만 지하철 성추행을 일삼고, 일부 몰지각한 교수들만 표절을 일삼으며, 일부 몰지각한 국민만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회피하려 꾀를 부리고, 일부 몰지각한 남편들만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며, 일부 몰지각한 의사들만 제약 회사들로부터 리베이트를 받는다는 상식을 신봉하면서 자신은 그로부터 벗어나 있으리라 희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중과 대중매체의 호기심이 오락가락하는 이런 곳은 진실을 드러내기보다는 더욱 공고히 숨기면서 상투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실로부터 자신들을 수호하려는 이들이 탐닉하는 상투어들은 현란한 조화造花처럼 만개한다.
인문학에 관한 한 여자 문제
인문학은 여자들의 텃밭이 된 지 오래다. 십 몇 년 전부터 인문학과 독서 모임을 열면 참여자의 절대다수는 여성이다. 남자들은 취업 준비를 하거나 술집에 갔다고들 한다. 이것을 두고 혹자는 “우리 시대에 구제를 받을 것은 오히려 남자이며 정작 더 불쌍한 존재로 봐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이런 물음에 저자는 “(인문학은) 여자들을 구제하기에도 벅차고 바쁘다!”라고 말한다. 물론 이 답변은 질문자의 물음을 얼마간 패러디한 것이며, ‘인문학이 인간을 구제한다’는 식의 논변에 적잖은 문제가 있음을 알고도 답하는 것이다.
저자는 “그 무엇을 살리는 것은 인문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한때 남자들이 떼를 지어 인문학을 소비하다가 다른 곳으로 떠나갔듯이, 그 빈자리를 떼 지어 채우고 있는 여자들도 얼마간 인문학 소비자로 행세하다가 자리를 뜰 것이라고 내다본다. 다만 여자들이 준비하고 담당하는 사회적 구조 변동의 가장 중요한 징표는, 떠나간 남자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진단 속에 들어 있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인문학은 정신문화적 자존심의 얼굴마담, 혹은 어떤 정화된 욕망의 매개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결국 그 무엇을 살리는 주체는 사람일 텐데, 그 사람들이 자신의 사적 욕망과 허세를 위해 인문학을 겨끔내기로 이용하는 것일 터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곧 죽인다는 것
화폐로 이미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세상이지만, 사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인문학이나 종교가 품어온 지혜의 알속은 상품 체계 바깥에 ‘사지 말아야 할 것’들을 모시고 키우고 배려해왔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 둘이 제 역할을 못한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며, 사람들은 거의 모든 게 상품에 속하게 된 터에 무엇을 좋아하면 사들이고 죽이는 짓에 익숙해졌다.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는買 것이 결국 죽이는 것’이며, 다만 그 행위는 부드럽게 ‘좋아한다’는 명명된다고 지적한다. 가령 치킨이나 주꾸미를 좋아한다는 것은 닭이나 주꾸미를 튀겨서 죽인다는 뜻이며, 산과 물을 좋아한다는 말은 그곳을 훼손하겠다는 뜻이고,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그 사람에게 부지불식간에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은 다른 존재를 죽이지 않고는 하루도 살지 못하는 존재다. 고등어와 돼지를 죽이고, 오리와 도롱뇽을 죽이고, 더덕과 양파를 죽인다.
하지만 남을 죽여야 자신이 산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 죽임의 방식에서나마 인간다움의 노력과 예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명에의 외경’ 같은 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 해도, 생명을 놓고 게임을 벌이는 짓은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영혼은 어떻게 생기는가: 한 뼘 깊이에서 부스대는 영혼들
누구나 영혼쯤은 공평하게 주어진다고 여긴다. 감히 경상도 사람의 영혼이 조금 모자란다거나, 평안도 사람의 영혼이 조금 붉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학문의 틀 안에서, 혹은 근대세계의 체제 속에서 많은 이는 ‘영혼’이라는 말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혹은 니체 식의 태도를 본받아 이 말을 되도록 쓰지 않도록 조심한다. 영혼을 탐색하는 이 책의 저자는 “영혼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도 쓸모가 있다”고 말한다. 영혼을 향한 인류의 지적, 영성적 모색에서 배울 것만큼이나 이 말을 우회하려는 노력에서도 참신한 고민의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영혼은 창의적 실천 속에서 쉼 없이 체험하는 방식과 관련되는데, 첫째 그것은 ‘감사’ 행위와 연관된다. 만약 ‘감사’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감사를 한 사람은 그걸로 끝이고, 감사를 제대로 받은 사람도 제 몫을 챙겼으니 영혼에 관한 한 별 볼일이 없다. 영혼은 늘 감사받지 못한 데서 생기는데, 그 부족不足을 아무도 모르게 삼켜버리는 것이 알속이다. 즉 감사의 빈곤을 넉넉히 삼켜서 만들어낸 그것이 영혼의 젖줄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도 억울함으로 목 놓아 우는 이들은 밖을 향해 소리를 높이는 한편, 자신의 속이 변해가는 기미를 살펴야 한다. 말해도 닿지 않음, 울어도 풀리지 않음, 위로받아도 당치 않음 속에서 생성되고 있는 또 다른 영혼의 씨앗을 살펴야 한다. 말해도 닿지 않음으로 말해야 하고, 울어도 풀리지 않음으로 울어야 하고, 위로받아도 당치 않는 무연憮然함 속에서 생성되고 있는 다른 영혼의 자화상을 응연히 살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