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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희원 교수, 김인정 기자, 홍성수 교수 추천! ★ “피해자의 지위는 이제 특권이자 무기이다.” 모두가 자신을 ‘진정한 피해자’로 내세우는, 타인의 고통을 잊어버린 억울한 피해자들의 사회에 대하여 “플랫폼마저 권력과 자본에 점령당한 시대,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도둑맞은 피해자성을 되돌려줄 책.” _김인정 (저널리스트, 《고통 구경하는 사회》 저자) “어떻게 특권을 지닌 힘있는 가해자 남성들이 피해자 행세를 하게 되었는가? 이 중요한 책은 새롭고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한다.” _에바 일루즈, (《감정 자본주의》 저자) “악랄한 허위 고발로 저와 가족의 명예는 돌이킬 수 없이 무너졌습니다.” 2018년 가을, 성폭력 혐의로 고발당한 미국 연방대법관 후보 브렛 캐버노는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트럼프와 공화당 의원들은 그에게 연민을 표하며 “미국의 젊은 남자들에게 아주 힘든 시대”라고 한탄했고, 소셜미디어에는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아우성이 들끓었다. 그를 고발한 크리스틴 블래시 포드도 소셜미디어에서 전 세계 여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나, 캐버노 지지자들의 살해 협박에 시달렸다. 블래시 포드 외에도 세 여성이 용기를 내 비슷한 증언을 했지만 캐버노는 수사조차 받지 않고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가 눈물을 흘리며 억울한 피해자라고 열변을 토하는, 그럼으로써 상황을 모면하는 장면은 우리 사회에서도 익숙한 풍경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언제부터 가해자가 자신이야말로 억울한 피해자라고 호소하기 시작했을까? 그 적반하장은 어떻게 가능한가? 무엇보다, 왜 피해자를 자처하는 것일까? ‘피해자의 지위는 이제 특권이자 무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런던정치경제대학교 교수 릴리 출리아라키는 《가해자는 모두 피해자라 말한다》에서 피해자와 피해자성(victimhood)의 역사와 ‘무기화’ 현상을 파헤친다. 현대사회는 소셜미디어와 언론에 고통이 넘실대는 ‘고통의 민주주의’ 사회다. 성폭력 피해 여성, 인종차별에 시달리는 흑인, 이동권을 박탈당한 장애인 등 소수자의 고통도 확산하지만, 동시에 ‘역차별’을 억울해하는 남성, ‘소수자 우대 정책’을 한탄하는 백인, ‘무고’를 읍소하는 가해자의 고통도 무차별적으로 확산한다. 인권이라는 대의하에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은 모두 공감과 연민을 받아 마땅한 ‘피해자’로 보이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언뜻 시민의 책무처럼 느껴진다. 누구의 주장이든 ‘나는 억울하고 고통스럽다’라는 개인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것이 원론적으로 윤리적일 수 있을까? 저자는 이처럼 개인의 상처와 인권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일수록 피해자는 공감과 연민, 정당성과 발언권을 부여받기에 피해자성이 ‘무기’로 남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피해자성이 유용한 정치적 무기가 될 때, 피해자의 지위에 오르는 것은 남의 목소리를 짓누르며 목청을 높일 수 있는 권력자들이다. 피해자의 지위가 가장 정당한 권력의 표상을 가진 지금, 가해자들의 거짓된 피해자 행세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누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연대해야 하는가? 저자는 ‘누가 피해자로 인정받았는가’를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현대에 벌어지고 있는 ‘피해자성 전쟁’을 파헤치며 취약한 사람들에게 피해자의 지위를 되찾아줄 대안을 모색한다. “백인 남성은 근본적으로 선하며, 오직 우발적으로 악하다” 피해자의 자격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피해자의 지위가 권력이라면, 가장 중요한 문제는 ‘누가 피해자가 되는가’이다. 이때 피해자란 단순히 상처나 손해를 입은 자가 아니라, 자신의 고난을 반복적으로 주장하면서 인정받은 자다. 성폭력을 겪고도 가해자와 ‘무고’라는 편견이 두려워 고발하지 못하는 여성은 피해자가 되지 못한다. 피해자란 인정 투쟁을 통해 획득되는 지위이며, 고난을 겪은 이들의 역사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저자는 인류가 경험한 최대의 고난인 전쟁들, 전면전으로 치러진 미국 독립전쟁과 양차 세계대전, 냉전 시기의 베트남전쟁, ‘인도주의적 안보전쟁’을 표방한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톺아보며 ‘누가 피해자로 인정받았는가’를 살핀다. 그는 전쟁의 폭력에 희생된 민간인보다 전쟁을 수행한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군인의 복잡한 지위에 주목한다. 군인은 독립전쟁과 양차 세계대전에서 대의를 위해 희생한 숭고한 피해자였고, ‘대의’가 부재한 베트남전쟁에서는 ‘이념에 의해 살생을 강요당한’ 피해자, ‘안보전쟁’에서는 서구 국가가 원하는 ‘세계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전투를 수행하는 피해자로 호명되었다. 전쟁을 일으킨 서구 국가 백인 남성의 정당성을 대변하기 위해 이 피해자의 지위에는 유럽과 미국의 백인 군인만 오를 수 있었으며, 유색인종 군인, 심지어 주로 여성과 어린이인 민간인 희생자의 자리마저 없었다. 저자는 20~21세기 전쟁의 명분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백인 남성이 ‘유일한’ 피해자로 자리매김했다고 역설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피해자성의 어휘는 이런 배제의 역사에 기초한다. 이는 취약성이 인류의 “보편적인” 속성이 아니라 20세기 근대성의 전형적 피해자로서 백인 남성에게 특별하게 주어진 자격임을 곱씹게 한다. 백인 남성은 싸우다가 고통받고, 살해하다가 고통받고, 보호하다가 살해하고, 보호를 위해 고통받는다. (…) 서구 남성 자아가 근본적으로 선하고 오직 우발적으로만 나쁘며 자신이 저지른 모든 폭력 때문에 전문적인 의학적 처치와 공감을 받아 마땅한 유일한 행위자라는 개념을 유지·온존시킨다.“ _〈과거에는 누가 피해자였나?〉에서 한편 20세기 이후는 보편적 인권 개념 아래 많은 이들이 피해자로 인정받은 시기이기도 하다. 흑인·여성·성소수자·장애인·노동자의 사회운동은 가부장제, 인종주의, 자본주의에 저항하며 생존권과 시민권을 쟁취해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부당한 폭력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백인 남성에게만 온전히 부여·인정되었던 피해자성을 일부 부여받았다. 이처럼 특권층만을 피해자의 지위에 올려놓으려는 인종주의적·성차별적 기획과 이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이 동시에 벌어지면서 피해자와 피해자성은 여러 입장이 경합하며 변화하는 정치적 개념이 되었다. “나도 억울한 피해자다!” 피해자의 지위는 어떻게 빼앗기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피해자’는 대체 누구인가? 앞서 말했듯, 자신의 고난을 반복적으로 주장하고 인정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소셜미디어의 시대에는 정당성만으로는 결코 부당한 고난을 겪는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없다. 소셜미디어에 넘실대는 고난은 그 고난을 유발한 원인이나 맥락과는 무관하게 떠돌다가 임의의 사용자에게 도달한다. 사용자들은 고난의 맥락을 세세히 살피기보다 자신이 이입하거나 정당화하고 싶은 부분에 공감을 표하며 이를 다시 확산한다. 역설적으로 고난은 널리 퍼질수록 그 원인과는 멀어지며, 소셜미디어는 고통과 공감을 호소하는 주장이 맥락과 분리된 채 경쟁적으로 확산할 뿐인 ‘피해자들의 시장’이 된다. 이 시장에서는 성폭력 피해자와 억울함을 주장하는 가해 용의자가 똑같이 자신의 고난에 공감해줄 것을 요청하고, 누구의 말이 더 정당한지 묻지 않는 알고리즘은 오로지 ‘더 인기 있는 주장’을 증폭한다. 고난의 경험과 그 조건의 분리야말로 가해자, 권력자가 원하는 바이다. 개인의 고난이 어떤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하는지 지워버릴 수 있다면, 고난에 처한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 마땅한 동등한 존재가 된다. 성폭력 피해자의 트라우마도, ‘억울한’ 가해 용의자의 눈물도 하나의 인간적 아픔일 뿐이고 권력형 성폭력이라는 사회적 문제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 가해자이자 서로에게 상처받은 피해자인 두 개인의 갈등으로 축소된다. 이처럼 폭력의 구조를 감추고 피해자의 지위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주장하는 피해자성을 저자는 ‘전략적 피해자성’이라고 명명한다. 전략적 피해자성은 차별에 대한 시정 조치를 ‘역차별’로, 코로나19 팬데믹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