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의 얼굴을 가진 한 무명의 유색인이 그리는 ‘검은 미국’의 진실한 초상!
미국 흑인애국가의 작사가이자 아프리칸아메리칸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히는 제임스 웰든 존슨의 대표작이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동시에 외교관이었던 작가가 니카라과 총영사를 지내던 1912년 익명으로 이 작품을 발표했다. 당시 흑인의 인종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소설들은 다수의 백인 독자들에게 외면당했던 이유로 가짜 자서전의 옷을 입고 출간되었으며, 프로파간다 문학의 한계를 벗어나 미국 흑인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최초의 현대 흑인소설로 평가할 수 있다. 한 흑백혼혈인이 겪는 ‘검은 미국인’으로서의 소외감과 인종 정체성의 문제를 흑인 문화와 대중예술에 관한 생생한 묘사와 함께 진솔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흑인은 미국 생활의 창조자이며 기여자로 인정되어야 한다.
인종편견을 타파하는 데 그 이상 중요한 것은 없다.” _제임스 웰든 존슨
1871년 미국 플로리다 주 잭슨빌에서 태어난 제임스 웰든 존슨은 애틀랜타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스탠턴 학교에서 교장으로 교편을 잡았다. 동시에 독학으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해 플로리다 주 최초로 흑인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서른 살부터는 음악을 공부한 동생 로저먼드 존슨과 함께 200편가량의 뮤지컬 곡을 만들기도 했다. 1906년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베네수엘라 영사에 임명되었으며, 1909년에는 니카라과 총영사직을 맡았다.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도 꾸준히 시를 발표했는데, 이 시기에 백인의 외모를 가진 한 혼혈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을 익명으로 출간한다.
작가의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조그만 출판사에서 소량 발행된 초판본은 미국 흑인 작가들이 당면한 당시의 출판 상황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컸다. 흑인의 인종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대부분의 흑인 작가들은 다수의 백인 독자들에게 반응을 얻지 못했고, 반면 흑인 작가들의 노예시절 경험담이나 자전적 기록은 호응도가 높은 편이었다. 존슨이 그의 소설에 ‘자서전’이라는 말을 붙이고 작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유였다. 발표 당시 대부분의 독자들도 이 작품이 한 익명 흑인 작가의 자서전이라 생각했다.
미국 문학에 그려진 미국 흑인의 이상적이고 정형화된 문학적 개념은 너무 강해서 일반 독자들이 흑인들을 어떤 다른 배경에서 생각해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 흑인의 모습은 다리를 끌며 밴조나 뜯고 희죽거리는 만사태평형으로 정형화되어 있으며 일반 독자들은 아직 흑인을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설득되지 않았다. 흑인이 사회적으로 자기 향상을 시도하는 노력은 ‘백인 문명’의 우스꽝스러운 희화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점잖은 집에서 상당한 문화를 누리며 살고 당연히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행동하는 유색인들을 다루는 소설은 코믹 오페라 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점에서 흑인은 비극을 연기하기 위하여 더 가벼운 역할들을 포기하는 훌륭한 희극 배우의 입장과 흡사하다. 그가 자신의 깊은 열정의 감정을 아무리 잘 표현하다 해도 일반 대중은 예전에 맡았던 그의 역할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를 다시 희극으로 돌아가도록 강요하기 위하여 심지어는 서로 공모해서 그가 진지한 작품에서 실패하도록 만들기도 한다.(159~160쪽)
존슨의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은 ‘미국 흑인소설의 전통을 따르되 그 전통에 새로운 조명을 시도’한 작품이다. 옅은 피부색의 혼혈 주인공, 도시와 농촌에서의 다양한 흑인들의 삶, 흑인에 대한 남부 백인들의 왜곡된 인종적 태도, 혼혈 흑인의 ‘백인 행세’등, 외양적으로는 이전의 흑인소설들이 다뤄온 주제와 소재를 다시금 다룬 듯 보인다. 하지만 그들에게 접근하는 작가의 시각은 사뭇 다르다. 우선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의 주인공은 이전 흑인소설의 ‘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졌다. 소설의 첫 장면에서부터 독자들은 주인공의 내밀한 의식 공간으로 곧장 안내되어 고백록 같은 그의 담담한 서술에 귀 기울이게 된다. 주인공의 모든 성장과 방황의 이야기를 독자들은 줄곧 그의 심리세계 속에서 함께 머물며 경청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겪는 외적 사건에 대한 묘사와 그러한 사건이 주인공의 내면과 심리세계에 어떻게 투영되어 내적 삶의 리얼리티를 이루며 그것이 한 인간으로서 자기성찰과 자아형성에 어떻게 기여하는가를 독자들은 이로써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에서 주인공은 ‘뿌리 없음’ ‘소외감’ ‘불안정성’을 확인하며 흑인인 동시에 미국인이어야 하는 ‘이중의식’의 늪에서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한다. 이러한 내면적 삶의 중요성은 이전의 흑인소설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며,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문학사적 의의는 바로 이 ‘현대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종 주제와 사회 항변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흑인소설의 폭 좁고 경직된 프로파간다 문학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현대성이 뒷받침됨으로써 가능했고.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을 “미국 흑인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최초의 현대 흑인소설”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이 작품에서는 노예해방 이후 고등교육을 받은 흑인들의 다양한 삶의 양태와, 래그타임과 케이크워크 같은 흑인 대중예술문화의 면면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