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세에서 근대까지, 서양사의 핵심을 관통하다
『민음 지식의 정원』 시리즈 서양사편이 ㈜민음인에서 출간됐다. ‘시대를 뛰어넘는 삶의 근본적인 물음에 답한다’를 모토로 출간된 『민음 지식의 정원』은 인문학적 지식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인문 교양 문고 시리즈이다. 총 12권으로 구성된 서양사편 시리즈의 2차분으로 출간된 책은 『지중해 교역은 유럽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근대정신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서양 기독교 세계는 왜 분열되었을까?』, 『유럽의 절대 군주는 어떻게 살았을까?』 네 권이다.
각 권의 제목은 서양사의 시대별 핵심 주제에 대한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 또한 일방적 주입이 아닌 일상적인 물음에서 출발하는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어 역사를 읽으면서도 다양한 물음을 통해 논리적 사고력을 키울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출신의 교수들로 구성된 저자들은 그동안 우리나라 서양사 학계에는 독자적인 연구 성과가 없었다는 데 문제의식을 같이한다. 지금까지 기계적으로 받아들인 서양의 연구를 소개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 시리즈는 우리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자체적으로 해석한 서양사를 표방한다.
서양사편 1.2권의 저자인 정기문 교수(군산대 사학과)는 “서양의 연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서양의 시각과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리즈는 우리가 서양을 바라볼 때에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를 선정해 구성했다. 한국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서양사라는 측면에서 대중적인 관심 또한 크게 높일 것”이라고 말했다.
▶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읽는 재미까지 더한 서양사
이번에 출간된 네 권은 중세부터 근대까지 서양사에서 가장 흥미롭고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시대를 조명한다. 5권 『지중해 교역은 유럽을 어떻게 바꾸었을까?』에서는 마르코 폴로와 같은 베니스의 상인으로 유명한 중세 지중해 무역에 대해 다루고 있다. 베니스의 상인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유대 상인, 이슬람 상인 등 다양한 사람들의 활동으로 유럽이 부를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어떻게 문화를 꽃피운 르네상스 시기를 이끌어 냈는지 알려 준다. 6권 『근대정신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에 탄생한 걸출한 작품과 작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자칫 소홀히 다루기 쉬운 부분인 근대를 가능하게 했던 다양한 사상과 학문적 발전에 대해서도 짚어 본다. 7권 『서양 기독교 세계는 왜 분열되었을까?』에서는 기독교가 지닌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고 종교 개혁을 중심으로 서양 기독교 세계가 어떻게 분열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본다. 2차분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유럽의 절대 군주는 어떻게 살았을까?』에서는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1인 통치 체제를 완성한 유럽의 절대 왕정이 성립할 수 있었던 사회적?사상적 배경과 화려한 궁정 문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책 속에서 발견하는 의외의 역사적 사실들
① 중세 지중해 무역은 향신료와 같은 고가의 사치품 무역이었다?
지중해 무역을 사치품 무역으로 간주할 수 없는 보다 중요한 근거는 향신료처럼 비싸지도 않고 게다가 상품 가격에 비해 수송비가 비싸서 원거리 수송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곡물과, 직물 산업에 필요한 원료들이 지중해를 통해 활발하게 거래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품으로는 곡물, 올리브유, 포도주, 소금, 다양한 종류의 염장 식품들, 치즈, 고기, 생선, 꿀, 설탕과 같은 식품들이 있다.
5권 『지중해 교역은 유럽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본문 67쪽 발췌
② 종교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동방인들의 도움 때문이었다?
다양한 분야의 제작 기술도 동에서 서로 전파되었다. 동방에서 들어와 서유럽 기독교 세계를 바꾼 물건 중의 하나가 종이였다. ……중세 말 종이의 대량 생산은 유럽 역사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대량 생산이 이루어짐에 따라 가격이 낮아졌고 기록 생산은 이제 더 이상 성직자들의 점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상인을 비롯한 중간 계층들도 기록 생산에 참여할 수 있었다. 기록 생산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사상과 정보의 교환이 활발해졌고 그 결과 14~15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던 르네상스 문화가 알프스 이북으로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16세기 독일 등지에서 일어난 종교 개혁이 널리 알려지고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종교 개혁가들의 사상이 글의 형태로 대중들에게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5권 『지중해 교역은 유럽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본문 84~85쪽 발췌
③ 왜 미켈란젤로는 「피에타」 성모의 어깨띠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을까?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당시에도 이미 유명해서 그것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다. 하루는 한 관광객 무리가 빙 둘러 작품을 감상하는데, 누군가가 이 작품이 누구의 것이냐 물었다. 곧 관광 안내원쯤 되어 보이는 이가 ‘곱보’라는 사람의 작품이라고 엉터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뒤에서 이를 듣고 있던 미켈란젤로는 크게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당장 그날 밤에 「피에타」의 성모 어깨띠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예술 작품과 개인의 명성이 하나로 여겨지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6권 『근대정신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본문 108쪽 발췌
④ 루터는 정말 교회의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했을까?
일반적으로 독일 종교 개혁은 마르틴 루터가 1517년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늘날 상당수의 루터 연구가와 역사가들은 이것이 하나의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 루터가 반박문을 공개적으로 교회 문에 붙였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의 동역자인 필립 멜란히톤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하지만 멜란히톤이 대학교수로 비텐베르크에 온 것은 1518년의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눈으로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 주장은 루터가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제기되었고 루터 자신은 살아생전 이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진실이라고 보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면벌부 판매 관행을 비판하는 편지를 마인츠 대주교에게 보내면서 그 편지에 95개조 반박문을 함께 동봉했던 것이다. 다만, 루터가 면벌부에 대한 공개 토론을 촉구하는 전단을 교회 문에 붙이도록 했을 가능성은 있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한 것이 광범위한 대중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학자,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을 위해서였다는 것은 이 문서가 원래 독일어가 아닌 라틴 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7권 『서양 기독교 세계는 왜 분열되었을까?』 본문 108쪽 발췌
⑤ 절대 왕정은 군대 때문에 발전할 수 있었다?
군대 규모의 변화는 왕에 대한 귀족의 지위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중세의 귀족은 스스로 말과 무기를 구입했고, 그래서 상관의 명령에 대한 완전한 복종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관례적으로 규정된 복무 기간이 지나면 군대를 떠나 그들의 땅으로 되돌아갔다. (중세 기사들의 전쟁은 그래서 연중 날씨가 비교적 좋은 여름에만 치러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전쟁의 양상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무장 능력이 있는 귀족은 근위 기병대와 같은 중무장한 기사단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무기를 갖추었다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미래가 보장되지 않았다. 중무장한 기사들과 달리 서열상으로는 그들보다 한참 낮지만 점점 더 현대적인 화기로 경무장한 기사와 병사들이 등장했다. 총기의 발달은 중무장한 기사들에게 불리한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화기로 무장한 이 새로운 군대는 절대적으로 급료에 의해 운영되는 용병들로 국왕의 상비군이 되었다. 이제 전통적인 무력의 중요성이 사라지면서 귀족은 왕에게 점점 더 의존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8권 『유럽의 절대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