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천재 작가 페렉,
글로 그림을 약탈하는 글쓰기의 일탈을 시도하다!
세상의 모든 그림을 하나의 캔버스에 담고 싶었던
어느 부유한 미술애호가의 그림 같은 그림 사기극
사실과 허구, 진실과 거짓, 복제와 재현의 경계를
자기 파괴적 몸짓으로 지시하는 텍스트의 건축학
“인문 서가에 꽂힌” 두번째 작가, 조르주 페렉
문학동네는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의 두번째 작가로 ‘조르주 페렉’ 선집을 펴내며, 그 첫 책은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이다. 첫번째 작가 빌헬름 라베의 『포겔장의 서류들』에 이은 시리즈 두번째 책이다.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은 문학과 인문학의 경계에서 지성과 사유의 씨앗이 된 작품들을 위한 상상의 서가다. 문학과 인문학을 두루 포섭하는 창의성과 실험성, 작품성을 갖췄으나 뚜렷한 범주로 분류되지 않는 애매한 위상 때문에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작품들을 모았다. 경계를 허무는 동시에 생성해나가는 다채로운 작품들의 향연,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은 라베와 페렉을 넘어 <레몽 루셀 선집><클라우디오 마그리스 선집><안토니오 타부키 선집> 등으로 이어질 것이다.
조르주 페렉은 20세기 후반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다. 작품 활동을 펼친 기간은 15년 남짓이지만, 소설과 시, 희곡, 시나리오, 에세이, 미술평론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전방위적인 쓰기를 시도했다. 페렉 문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일곱 작품 -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인생사용법』『공간의 종류들』『겨울여행 & 어제여행』『생각하기/분류하기』『나는 기억한다』『잠자는 남자』- 으로 구성된 <조르주 페렉 선집>은 20세기 후반 프랑스 문학이 걸어온 쉽지 않은 도정을 축약해 제시하는 충실한 안내도 역할을 해줄 것이다. 나아가 20세기 후반에도 프랑스 문학이 치열한 문학적 실험을 벌였고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생생히 전해주는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미술에 대한 깊고 오랜 애정이 만들어낸, 글로 쓴 그림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1972년 페렉은 “나는 오랫동안 화가가 되고 싶었다”고 밝혔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목록을 작성하면서 그림 그리기를 포함시키기도 했다. 그림을 향한 이러한 열망은 그의 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출간 첫 소설 『용병대장』에서 『W 혹은 유년의 기억』『인생사용법』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이 하나의 그림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림이나 화가, 그림 그리기는 주요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소재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페렉의 애착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은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이다. “그림 이야기histoire d'un tableau”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어느 화가의 그림 속에 재현된 수많은 그림들에 대한 이야기다. 페렉은 브뤼셀 왕립미술관에서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이라는 그림을 본 후 이 작품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미술애호가의 방쿤투스캄머Kunstkammer: ‘예술의 방’이라는 뜻의 독일어’은 안트베르펜을 중심으로 한 플랑드르 회화에서 발달한 특별한 유형의 그림으로, 16세기 말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이 부를 과시하기 위해 예술품이나 고상한 취향의 물건을 모아놓은 방을 재현하는 데서 유래했다.)
페렉은 ‘미술애호가의 방’ 계열의 그림이 재현의 재현(현실을 재현한 그림을 재현)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재현과 복제의 수단으로서의 예술, 이전 작품과의 관계 속에서 가치와 의미를 갖는 예술의 상호텍스트성 등의 문제를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을 통해 탐색한다. 그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노박을 빌어 “모든 작품은 다른 작품의 거울이다. 모든 그림들의 진짜 의미는 이전 작품과의 관계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기존의 작품은 새로운 작품 안에서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단순 복제되거나 훨씬 더 암시적인 방식으로 암호화되어 삽입된다”고 말한다. 이는 예술가를 ‘창조자’가 아닌 ‘참조자’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페렉의 예술관을 반영한다. 페렉이 시도한 ‘인용의 문학’, 즉 ‘다시 쓰기’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페렉은 기존 작품의 참조와 인용, 분해와 재구성을 통한 ‘다시 쓰기’에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기존의 작품들에서 잘라낸 조각들을 조합해 새롭게 구성하는 글쓰기를 시도했다.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은 페렉의 ‘다시 쓰기’가 그림을 매개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여기서 문학 작품은 회화로, 텍스트는 캔버스로 전환된다. 작품에 나오는 그림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속에 재현되어 있는 수많은 그림들은 “다시 쓰인 글”의 변형인 “다시 그린 그림”으로 볼 수 있다. 동시에 이는 화가가 되고 싶었던 페렉이 글로 쓴 그림이기도 할 것이다.
필생의 대작 『인생사용법』을 완성하는 최후의 조각
페렉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경향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문학 세계에 있다. 그는 현대를 살아간 한 서구 작가가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특징을 그리 많지 않은 작품 속에 녹여냈다. 누보로망 Nouveau Roman의 열풍이 지나간 후 이렇다 할 대표 작가를 찾지 못하던 프랑스 문학계는 페렉이라는 천재작가를 발굴하면서 어느 정도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페렉의 필생의 대작인 『인생사용법La Vie mode d'emploi』(1978)은 도전적인 실험정신과 탁월한 언어감각, 해박한 지식, 풍부한 이야기, 섬세한 감수성 등 다채로운 문학 세계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한 편의 ‘총체적인 소설’이다. 『인생사용법』이 출간된 후 바로 다음 해에 발표된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1979)은 99개의 장障으로 이루어진 『인생사용법』의 “100번째 장”이라고 불리우며, 그만큼 전작과 밀접하면서도 복합적인 관계를 갖는다. 이는 페렉이 어느 라디오 인터뷰에서 오랫동안 공들여 작업했던 『인생사용법』과 쉽게 작별할 수 없어 이 작품을 썼다고 밝힌 데서도 드러난다.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에 나오는 수많은 그림은 『인생사용법』의 각 장에 등장하는 요소를 직간접적으로 지시한다.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에 등장하는 첫 회화 작품 <성모방문화>는 『인생사용법』 제1장에서 윙클레의 아파트를 ‘방문’하는 ‘여인’을 지시하며, 제27장에서 발렌의 그림 안에 등장하는 가구세공인 그리팔코니의 ‘파란색 에나멜 커피 주전자’는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에서 가르텐의 그림 <탁자 위의 찻주전자>와 교묘하게 연결된다. 이 그림은 퀴르츠가 그린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그림 속 수많은 모작模作 중 하나로 등장하고, 그 모작에서 찻주전자는 파란색 에나멜 커피 주전자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은 어떤 의미에서, 『인생사용법』의 다시 쓰기라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예술적 창조의 근간을 형식상의 제약에 두는 실험 문학 그룹 울리포Oulipo의 강령을 창의적인 방식으로 이행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인생사용법』이라는 틀 안에서 가능한 실험과 유희, 참조와 변형을 시도하고 두 작품이 교묘한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어 서로를 반향하게 만든다.
예술가, 그 “우울한 운명”을 자발적으로 살아내는 긍정적인 시도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에 등장하는 부유한 미술애호가 헤르만 라프케는 화가 하인리히 퀴르츠에게 자신이 수집한 수많은 그림들을 걸어놓은 방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한다. 이 주문을 실행에 옮긴 퀴르츠의 그림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은 관람객을 단숨에 사로잡고 전시회를 혼란에 빠트린다. 그가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속에 그림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을, 그 그림 속에 또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림 속 복제는 미세한 붓터치만 남을 때까지 계속된다. 놀라운 것은 퀴르츠가 정확성을 유지하면서도 복제의 각 단계마다 미세한 차이를 만드는 일종의 유희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첫번째 복제그림에서 강인해 보였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