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Description
이낙연을 만든 뿌리의 시간과 여정 국가비전 ‘내 삶을 지켜주는 나라‘에 대한 생생한 육성! 서울대 법대 출신. 5선 국회의원이자 전남 도지사와 국무총리,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를 지냈고 정치인이 되기 전에는 《동아일보》 기자로 21년 동안 일함. 이것이 국회의원 이낙연에 대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력 혹은 스펙이다. 이러한 스펙은 한 사람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지만 이와 동시에 한 인간에 대한 의미 있는 정보는 전혀 찾아볼 수 없기도 하다. 누군가를 제대로 알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표정과 작은 습관들을 눈을 마주하면서 지켜보고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대화를 통해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저자가 『이낙연의 약속』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국민 한 명 한 명과 일일이 눈을 마주칠 수는 없겠지만 이 책을 통해 이력서상의 스펙이 아닌 인간 이낙연을 소개하고 많은 사람들과 유대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이른바 ‘이낙연의 프로포즈’라 할 수 있겠다. 이낙연이 당신에게 손을 내밀다 처음 만난 상대에게 약간의 과장된 말을 하거나 애써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감추는 것 정도는 큰 흠이 되지는 않을 테지만 저자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화려한 포장지에 쌓인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더도 덜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이낙연을 보여주는 것, 그리하여 가식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시작부터 돌직구다. 이낙연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누추한 청춘이었다고 회상한다. 제가 동생들한테 말합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 오른 팔뚝은 누구 거고 왼 팔뚝은 누구 거고. 평생에 신세 진 사람들이 쭉 있거든요. 많이도 얻어먹고 살았죠. 그것도 부자한테 얻어먹으면 덜 미안한데 왜 꼭 저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그런 사람들만 찾아다니면서 얻어먹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한심한 청년이었어요. 고비고비마다 저한테 밥을 해주신 친구 어머니들도 모두 기억이 납니다. 한결같이 가난한 집들이었지요. _본문 중에서 영양실조 초기 증상으로 눈앞에 검은 점이 오락가락하는 비문증에 걸리기도 하고 대학 시절 내내 갈비뼈가 그대로 보이는 앙상한 몸을 하고 살았다. 대학 졸업 앨범에는 시신을 찍은 것 같은 얼굴이 실렸는데 군대에 가서야 정상적인 몸으로 돌아온다. “기록에 남는 것은 무슨 대학 무슨 과가 남겠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어쩌면 누추, 남루, 이런 표현 쓰는 것조차도 자기 미화지요. 그것보다 훨씬 더했을 수도 있어요.” 저자의 말처럼 기록만으로 한 사람의 생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시 재수를 할 형편이 되지 못한 저자는 대학 졸업 후 동아일보사에 입사한다. 1980년의 언론자유 투쟁으로 당시 《동아일보》 기자 상당수가 해직되었는데 1979년 10월에 견습 딱지를 뗀 막내 기수들은 선배들이 열외를 결정해 기수 전원이 해직을 면한다. 또한 이 시기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지만 어떤 언론을 통해서도 광주의 실상은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실상을 알리지 않았고 다른 누군가는 알리지 못했겠지만 그 결과는 같았다. 광주 시민들은 단지 폭도일 뿐이었다. 지금까지도 죄책감이 있습니다. 그 무렵 외무부 출입 기자였습니다. 견습 끝나고 바로 정치부 기자가 되어 외무부를 담당했어요. 친구들이 날마다 저한테 전화해서 퍼붓는 거죠. 그것도 못 쓰는 게 기자냐, 이 사꾸라 자식아. 《동아일보》도 신문이냐? 그렇게 실컷 제게 퍼붓곤 했지요. _본문 중에서 저자뿐만 아니라 그 시기를 살아왔던 많은 사람들이 갖는 감정이 이 채무감이다. 그도 우리도 암울하던 시절을 견디고 살아남았지만 우리만 살아남았다는, 함께 하지 못했다는 마음의 빚을 지고 살아간다. 한편으로는 이 나라의 민주화를 이만큼이라도 이뤄낼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그 채무감이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농업의 미래를 위해 국회의원이 되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나고 자란 곳을 떠나 그곳의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죄책감 혹은 미안함도 존재한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고향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늘 제가 조바심을 냈던 것은 저분들이 나를 달리 보지 않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었지요. 그래서 고향에 가면 일부러 옷도 허름하게 입고, 제 아내에게도 허름하게 입도록 부탁하고, 말도 고향 사투리를 일부러 더 쓰곤 했습니다. 술이나 술안주도 일부러 그분들조차 잊고 있던 옛날 것을 잘 찾아낸다든지 했지요. 그런다고 해서 그분들과 같아지는 건 아니겠지만, 그런 저의 행동과 생각은 그들을, 아니 그들의 애환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는 전달방식입니다. _본문 중에서 시대의 채무감이 이 나라를 이만큼 성장 시켰듯이 고향에 대한 생각, 대학 시절 그가 신세졌던 분들에 대한 기억들 역시 인간 이낙연을, 그가 꿈꾸는 세상을 단단하게 만드는 원동력의 하나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 중의 하나가 고향과 농촌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그는 취재원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2000년 정계에 입문하게 되는데 “뼈 빠지게 일해도 생활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농촌을 “편안한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곳으로 변화시키고 농업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입법 기능을 가진 국회의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4선 국회의원을 지낸 후에는 아예 전라남도 도지사에 취임해 농촌을 지키는 최일선에 서게 된다. 도지사로 근무를 하던 중 국무총리에 지명되어 국정의 중심에 선 저자는 독특한 화법과 치밀한 논리로 야당의원들을 상대하면서 일약 스타 총리로 부각되고 대권 선호도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이낙연 신드롬을 일으킨다. 2년 7개월 3일 동안 총리직을 맡으며 민주화 이후 최장수 총리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총리를 그만둔 그해 5선 국회의원이 되었고 민주당 공동상임선대위원장으로서 총선 압승을 견인했다.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선출된 이후에는 공수처 설치, 검찰·경찰·국정원 개혁, 공정경제 3법 등 422건의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민주화 이후 가장 크고 많은 개혁을 입법으로 이루었다. 국민의 삶에서 국가는 무엇인가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전직 대통령 사면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여론의 역풍을 맡게 되고 대선 주자로서의 위상에도 큰 타격을 입는다. 그가 이 문제를 꺼내 든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만 국민들, 특히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는 다수의 국민들은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것은 그에게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일한 2021년 4월 재보궐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기록적인 참패를 한다. 마음도 몸도 아팠습니다. 그 상태로 저는 한 달 동안 전국을 잠행하며 많은 분을 만났습니다. 특히 청년들을 집중적으로 만나며 그들의 삶과 꿈, 좌절과 절망을 들었습니다. 많은 분의 말씀을 들으며 저는 국민의 삶에서 국가는 무엇인가, 통렬한 질문을 저 자신에게 수없이 던졌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내 삶을 지켜주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내 삶을 지켜주는 나라’, 아마도 이낙연의 정치는 끝까지 이 숙제에 매달릴 것이라고 저는 직감합니다. _본문 중에서 궁핍하던 대학 시절을 제외하고는 아마도 저자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아닐까. 저자는 자신이 “아픈 만큼 성숙해졌다”고 말한다. 그 아픔을 자양분 삼아 그가 들고 나온 국가비전이 ‘내 삶을 지켜주는 나라’다. 일자리와 소득 등 삶의 기본요소들이 불안정해진 4차산업혁명시대에 삶을 전방위로 옥죄는 코로나19를 거치며 사람들의 삶이 더욱 불안해졌고 이런 시대에 삶을 위협하는 모든 요소로부터 국민 개개인을 국가가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내 삶을 지켜주는 나라’라는 국가비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