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미안』을 쓴 헤르만 헤세가 들려주는 환상동화는 어떤 색채일까?
전쟁과 가족사를 겪은 노작가가 쓴 환상적인 이야기
헤르만 헤세가 쓴 환상적인 이야기를 엮은 단편집 『환상소설』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헤르만 헤세의 환상적인 문학 세계를 한층 더 폭넓고 깊이 있게 맛볼 수 있는 이야기 열한 편이 실려 있다. 아울러 자연의 이미지를 의인화하여 초현실적인 풍경과 상황을 회화, 설치 등으로 작업화하는 장종완 작가가, 헤세의 『환상소설』을 읽고 영감을 받아 작업한 작품 이미지 7점을 수록하여 화보로 구성하였다. 민음사는 1900년부터 1951년까지의 기간에 쓰인, ‘환상적이고 놀라운 사건을 시공의 제약 없이 자유로이 지어낸 이야기’를 뜻하는 『환상동화(Marchen)』와 보다 깊은 통찰과 경험을 담고 있으면서도 읽는 이를 사로잡는 마력은 동화의 매력에 진배없는 『환상소설(Erzahlung)』 2종을 함께 출간하여 헤세가 독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진정한 ‘환상’의 의미, 헤세 특유의 사상과 미학과 해학을 전달하고자 했다. 헤세는 인생의 만년에 동화를 쓰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상과 화합할 길을 찾아내려고 했다. “나 자신의 삶이 동화처럼 보인다.”라는 헤세의 말처럼, 헤세의 동화에는 사랑과 자유, 꿈에 대한 바람이 담겨 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형제의 동화와 『천일야화』에 빠졌던 헤세에게,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낭만주의 작품들은 그를 ‘마술적 환상’으로 안내하는 입구가 되었다. 1925년에 쓴 「짧은 이력서」에서 헤세는 이러한 사고의 전환에 대해 고백하고 있다.
“고백하거니와, 나 자신의 삶이 바로 동화처럼 보일 때가 많다.
나는 바깥 세계와 나의 내면과 화합하고 어울리는 모습을 자주 보고 느낀다.
이러한 연관성을 나는 마술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 헤르만 헤세
▶ 독일의 민중동화와 헤세의 환상동화
헤르만 헤세는 어린 시절부터 동화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였다. 그림 형제의 동화와 『아라비안 나이트』를 특히 좋아했던 헤세는 그 외에도 중국이나 인도, 아프리카의 동화를 탐독하였으며 호프만이나 릴케, 되블린 같은 독일 작가의 작품도 즐겨 읽었다. 저자를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내려오는 민중동화가 헤세의 창작동화에 뿌리가 되었던 것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독일의 민중동화는 일찍이 그림 형제의 열정적인 노력에 힘입어 당당하게 문학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았으며, 그 연구와 창작 활동 역시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다. 독일의 문학사전에 의하면, ‘동화(Marchen)’는 “환상적이고 놀라운 사건과 상황을 시간과 공간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지어 낸, 민중이 즐기는 짧지만 산문적 이야기”를 뜻한다. 이러한 동화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전통적으로 쓰여온 표현법, 즉 마술적 요소가 등장하여 소원을 이루어주거나, 다른 인간이나 동식물로 변신시키는 것 등은 헤세의 동화에도 자주 나타나는 모티프이다. 『환상동화』의 주인공들은 이러한 마술적 과정을 통해 사랑의 필요성을 깨닫고, 유년 시절을 되새기며 노년의 경험과 통찰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헤세의 작품이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 ‘환상동화’라고 불리는 데에는 헤세만의 독특한 마술적 세계관이 큰 몫을 했다. 헤세는 1차 세계 대전 중 정신분석 치료를 받으면서 사고와 가치관에 심한 변화를 겪었다. 이것이 인습적인 가치를 부정하고 ‘마술적 사고’라고 불리는 새로운 길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마술적인 사고는 내적인 현실과 외적인 현실, 즉 자연과 정신을 동일한 존재 양식에 속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뜻한다. 헤세는 이러한 마술적 인생관을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표현법을 찾아야 했고, 이것은 동화라는 장르를 통해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이처럼 동화의 특성을 살리기 위한 전통적인 방법들과 함께 마술적 인생관이 어우러지면서 헤세의 『환상동화』가 태어나게 되었다. 동시에 많은 작품들은 그 내용적 깊이로 인해 성인동화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 이상 사회를 향한 꿈과 마술적 사고
이러한 성장 배경과 맞물려 헤세가 동화를 쓰게 된 데에는 두 가지의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 하나는 1차 세계 대전으로, 구질서가 붕괴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보다 이상적인 사회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표현주의자들의 희망에 헤세도 공감하였다. 인간과 세계의 개선에 대한 소망을 표현한 헤세의 동화「팔둠」,「다른 별에서 온 소식」,「새」 등은 헤세의 이러한 바람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정신분석 치료를 받은 체험이다. 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헤세는 개인적으로도 시련을 겪게 된다. 1914년 반전 사상이 담긴 글 「오 친구들이여, 그런 곡조의 노래를 부르지 맙시다」를 스위스 취리히 신문에 발표하여 독일의 극우파들로부터 매국노, 변절자로 매도당하는 일을 겪었다. 가정 형편도 여의치 않아, 막내아들의 중병과 아버지의 사망이 잇따르고, 부인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책의 출판까지 제한당하자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세 아들을 친구와 기숙사 학교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헤세도 심한 노이로제에 걸려 스위스의 루체른에서 심리학자 융의 제자인 랑 박사로부터 정신분석 치료를 받게 된다. 이 치료로 정신적 안정을 되찾은 헤세는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분석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성향은 이 시기에 씌어진 동화 대부분에 잘 나타나 있다. 헤세의 동화에서 ‘마술적 사고’라고 일컬어지는 환상의 세계를 통해 유년기를 되찾는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정신적 안내자의 도움으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동화 「아이리스」(1918)와 「험한 길」(1916) 등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소설 『데미안』(1919)처럼 영혼의 심리 치료를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헤세의 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현명한 노인’, ‘산’, ‘새’ 등은 융이 자신의 논문 「동화 속의 정신적 현상학에 관하여」에서 주장한 대로 세계의 모든 동화에 나타나는 정신적 투사의 세 가지 전형적인 상이다. 1913년에 쓴「아우구스투스」, 「피리의 꿈」, 「시인」에서는 노인이, 「팔둠」에서는 산이, 「다른 별에서 온 이상한 소식」, 「새」, 「픽토어의 변신」에서는 새가 정신적 안내자가 된다.
▶ 참된 자아를 찾아 나가는 헤세의 ‘마술적’ 경험
「아우구스투스」에서 비밀스러운 노인 빈스방거 씨는 다른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지게 해주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는 이웃에 사는 과부 엘리자베트 부인의 아들 아우구스투스의 대부가 되어 아들이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게 해달라는 엄마의 소원을 들어준다. 그러나 그 소원은 재앙이 되어 아우구스투스는 절제를 모르는 도덕적 타락에 빠지게 된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수록 그는 인간을 경멸하게 되고, 쾌락의 대상으로 이용할 뿐이다. 결국 삶이 역겨워져 파우스트처럼 독배를 마시려는 순간 빈스방거 씨가 나타나 대신 독을 마신다. 대부의 권고에 따라 두번째 소원을 이루게 된 아우구스투스는 지난날의 죗값을 혹독한 시련을 통해 갚게 된다. 그러나 옛날의 마술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들에게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대신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 우아하고 사려 깊은 이야기는 전통적인 <소원 성취>의 모티브를 구사하는 동시에 정신적 안내자로 노인을 등장시켜 정신분석학이 헤세에 끼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다른 별에서 온 이상한 소식」에서 어느 평화로운 별에 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자 시신을 장식할 꽃이 부족하게 된다. 꽃 없이 묻힌다는 것은 영혼의 부활을 막는 것이기에, 한 소년이 꽃을 청하기 위해 왕에게 파견된다. 도중에 만난 커다란 새가 소년을 태우고 다른 별나라로 데려다준다. 그 별나라는 어린 시절 동화나 전설 속에 등장하던 전쟁의 참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다. 불행한 별나라의 왕에게 던지는 소년의 질문은 인간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