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에서
유교와 우리의 관계는 밀접하다.
우리의 조상들은 천년에 가까운 장구한 세월을 유교의 규범 속에서 살아왔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의 혈관 속에 유교적인 피가 돌게 만들어 놓았다. 유교는 우리 민족의 생리를 바꾸어 놓았다. 사고가 그러하였고, 말과 행동이 그러하였고, 생활이 그러하였다.
현대의 오늘에 있어서는 우리들이 인식하든 못 하든 간에 우리 생활의 구석구석에는 유교적인 것이 남아 있고, 사고의 심장부에는 유교적인 사고가 엄존하고 있다. 이렇게 유교는 우리에게 밀착해 있다.
대관절 그 유교라는 것은 무엇인가, 또 어떤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윤곽만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그것이 좋은 것이라면 현대적 감각에 맞도록 재생시키기 위하여, 좋지 않은 것이라면 끊어 버리기 위하여, 어느 부분은 좋고 어느 부분은 나쁘다면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기 위하여 우리는 유교라는 것의 정체를 알아야겠다.
우리는 유교를 알려면 먼저 공자를 알아야 한다. 유교란 공자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공자란 어떤 인물이기에 수천년 동안 그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의 가르침이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을 송두리째 지배하여 왔을까.
그러한 공자의 참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어를 읽는 것이 아마 가장 빠르고도 손쉬운 길일 것이다. 왜냐하면 논어는 공자의 언행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논어≫에는 공자의 모든 모습이 남김없이 드러나 있다. 또한 거기에는 그의 생애와 사상과 철학, 도덕관과 인생관과 인간성이 숨김없이 나타나 있다.
현대의 젊은이들은 혹시나 공자의 이미지를 몹시 완고하고 거추장스럽고 융통성 없는, 항상 딱딱하기만 한 존재로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 범상한 사람들과는 친근할 수도 없는 멀고 두렵기까지 한,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논어를 읽어 본다면 그런 생각이 잘못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공자는 너무나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공자의 말씀은 사고도, 행동도 어디까지나 인간의 범위 안에 있고 인간을 기초로 하고 있다. 喜?怒?哀?樂?愛?惡?欲의 인간적인 감정을 공자도 우리와 같이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냇가에 서서 ‘아아, 가는 것은 이와 같구나’ 하고 탄식하기도 하고, 제자가 작은 고을의 수령이 되어 백성에게 음악을 가르치니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구나’ 하고 농담을 하였다. ‘원한을 숨기고 그 사람과 벗하는 그러한 표리가 같지 않은 태도를 부끄러워한다’고도 하였으며, ‘삶도 잘 모르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도 공자는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