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현실과 상상,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넘나들며
영원한 시간을 살고 있는 어린 왕자
그가 도달했을 새로운 우주에 대한 상상
《누아Noir》, 이 책은 어느 어두운 새벽,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영원한 동경과 그리움의 대상인 어린 왕자. 그는 지금 어떤 세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있을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버리고 그는 새로운 우주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이 질문은 글을 빚어내는 작가와 이미지를 창조하는 미술가의 만남을 이끌어냈고, 우리는 신유진의 글에 장종완의 그림이 결합한 책이 아니라 두 작가가 각자 상상하고 창조해낸 두 이질적인 세계, 즉 ‘어린 왕자가 없는 어린 왕자의 세계’가 새로이 변주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신유진 작가가 창조해낸 세계는 칠흑 같은 어둠과 순백의 흰색만 존재하는 흑백의 세계다. 조종사와 헤어진 후 어린 왕자는 삶과 죽음 사이의 세계, 그 기다림의 공간에서 ‘화면’과 ‘소리’로만 자신의 삶을 기억할 뿐 더 이상 아무것도 감각하지 못한 채, 영원히 반복되는 ‘똑같은 오늘’을 살고 있다. 신유진 작가는 이런 세계를 떠올리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린 왕자와 생텍쥐페리의 공통점은 ‘사라졌다’는 결말이다. 어린 왕자는 사막에서, 생텍쥐페리는 정찰기가 추락한 바다에서. 빛과 소리를 흡수해버린 사막의 모래와 깊은 바다. 그 어둠과 적막 속에서 끝난 이야기를 다시 이어간다면……. 나의 ‘어린 왕자 다시 쓰기’ 프로젝트는 바로 거기에서 출발했다. 어둠 속에서 빛을 구하기, 적막 속에서 소리를 되찾기, 결말을 다시 열기. 나는 그것이 연극의 시작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배우는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빛의 자리를 찾아 나서고, 극의 언어는 시공간을 창조하며, 끝인 것만 같은 순간에도 이야기는 가느다란 희망을 만들기 때문에. 그래서 희곡이어야 했다. 그 세계는 그렇게 이어져야 했다. _〈이야기는 상자와 닮아서〉
한편 장종완 작가는 어린 왕자가 어른으로 성장해 살고 있을 세계를 색으로 표현하면서 대한민국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주요한 경험을 접목시킴으로써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어린 왕자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우주적인 풍경을 그리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있던 시기에 알마출판사 안지미 대표로부터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어린 왕자가 없는 새로운 작품으로 재창작하는 프로젝트를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약간은 운명이라 느꼈던 것 같다. (…)
어린 왕자는 어떤 어른으로 성장했을까?
상자 속 양들이 구멍을 통해 밖을 본다면?
어린 왕자가 살던 별이 바오밥나무로 뒤덮인다면 어떤 풍경일까?
이런 상상을 하다보니 엉뚱하게도 군 복무 시절의 경험이 떠올랐다.
그림의 주색인 녹색과 분홍색은 군 복무 시절 야간 훈련 중 사용한 적외선조준경과 팬데믹 시기에 흔히 보던 열 감지 특수 카메라의 화면에서 착안했다. 적외선이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하는 것처럼 이러한 색감의 그림을 통해 누구에게나 익숙한 《어린 왕자》의 세계에서 벗어나 그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고 싶었다. _〈어떤 행성〉
무無로부터 시작되어 태어난 이야기,《누아》
알마출판사의 오랜 희곡 사랑이
국내 창작희곡의 기획과 낭독극으로 이어지다
희곡은 다양한 출판물 가운데 많은 독자들의 사랑과 관심을 끌기 쉽지 않은, 비주류에 속하는 분야다. 그럼에도 알마출판사는 오랫동안 국내외의 수준 높은 희곡들을 뚝심 있게 소개하여 희곡의 저변 확대에 크게 기여해왔다. 특히 알마출판사가 출간한 작품들은 모두 우리 시대의 희곡으로 국내에서 전부 공연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알마출판사가 “아름다운 가상을 만들어내는 활자 극장”, 즉 GD(Graphic Dionysus) 시리즈로 소개한 작품은 13편에 이른다. 이 작품들은 〈월간 알마낭독극장〉과 〈알마 페스타〉라는 낭독 모임 또는 낭독 공연 모임을 통해 독자들과 함께 호흡해왔다. 독자들이 직접 희곡을 낭독하는 〈월간 알마낭독극장〉은 2023년 여름 시작된 이래 매달 1회씩, 1년간 진행되었고 〈알마 페스타〉는 2024년 10월 시작되어 2개월 동안 여덟 차례 모임을 갖는 동안 130여 명의 독자들이 참여하는 등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 낭독 모임은 희곡을 사랑하는 독자들뿐만 아니라 해당 작품이 무대에 올랐을 때 참여한 연출가와 배우들도 함께하면서 무대에서와는 또다른 연극의 에너지, 희곡의 진가가 발휘되는 장이 되어왔다.
이렇게 낭독 모임에서 소개된 것 가운데 몇 작품만 소개해보자.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태양》은 이 작품을 연출한 김정 연출가와 가쓰야 역의 김도완 배우가, 김은성의 《빵야》는 김은성 작가와 길남 역을 연기한 최정우 배우가 각각 참여해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내었다. 이 외에도 린 노티지의 《스웨트》는 오스카 역의 김세환 배우, 황정은의 《노스체》는 노스체 역의 최희진 배우가 낭독 모임에 참여해 알마출판사만의 독보적인 예술 파워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제 알마출판사는 한 단계 더 도약해 직접 기획하고 제작하는 새로운 창작희곡 시리즈, 즉 GD bis를 시작한다. 시리즈의 처음을 여는 《누아》는 두 가지 표지, 즉 ‘색을 잃은 활자의 세계’를 표상하는 타입 에디션Type editon과 ‘모든 색과 빛을 품은’ 타블로 에디션Tableau edition으로 제작되어 신유진, 장종완 작가가 각자 해석한 어린 왕자의 세계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12월 18일∼19일 배우 홍지인, 박현숙과 김정 연출가의 연출로 낭독공연 되었다.
김정은 2017년 연극 〈손님들〉로 동아연극상 신인 연출상을 받고, 2018년 두산연강예술상 공연 부문을 수상하는 등 우리 시대를 새로이 대표하는 젊은 연출가이다. 고전에서부터 번역극, 창작희곡 등 다양한 작품에서 창의적이고 디테일한 해석으로 텍스트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온 김정 연출의 〈누아〉를 통해 우리는 안지미, 신유진, 장종완, 김정이라는 이 시대 최고 예술가들의 협업으로 탄생한 보석 같은 작품의 정수를 맛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