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다시 전화할게>로 야마모토 나오키를 처음 접하고 좋아했다면 <해질녘의 친구들>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특히 표제작인 <해질녘의 친구들>. 작은 도시의 공무원인 남자는 매저키스트다. 직장 동료들에게 끌려 우연히 SM클럽에 갔다가 자신의 성향을 알게 된다. 유키코 여왕님을 알게 되어, 그녀에게 묶이고 맞고 학대당한다. 그가 처음으로 발견한 ‘정말 즐거운 놀이’였다. 하지만 유키코가 말도 없이 사라진 후 모든 것이 무료해진다.
파괴적인 놀이인 섹스의 심연까지 파고드는 <해질녘의 친구들>은 쓸쓸하고 막막하다. 모든 것이 우울하고 지루하다. 당신의 M은 ‘무엇인가를 치료하려는 프로세스’였고, 아마 치유가 되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가 생각했지만 아니다. 그저 잃어버렸을 뿐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 수 있는 누군가가 없어졌다, 그의 모든 것을 지배해야만 하는 여왕이 사라졌다. SM은 약속이고, 상대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단지 폭력이 좋아서 학대를 하는 인간도 있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행위일 뿐이다.
그를 좋아한다며, 그의 기벽까지도 받아줄 수 있다며 매달리는 여인을 보며 그는 생각한다. ‘결국 내 우울증도 이 사람처럼, 혼자 도취해서 발악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생각했더니 머릿속이 묘하게 차가워졌다.’ 그리고 폭주한다. 가장 더러운 것, 가장 아픈 행위를 그대로 드러낸다. 내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존재인지를 당신에게 보여주려 한다. 가장 더럽고 아픈 것으로 나를 드러내는 행위. 섹스는 때로 지옥이 되기도 한다. 보는 자에게는 지옥 아니 시궁창이지만 그에게는 열락의 반열이 된다.
표제작이 약간 과격하지만 나머지 단편들은 <내일 다시 전화할게>의 느낌에서 멀리 나가지 않는다. ‘슬프지 않은데 슬픈 느낌을 주는 말’을 좋아해서 <내일 다시 전화할게>를 그렸다는 야마모토 나오키의 말처럼 그의 작품들에는 은근한 슬픔이 배어 있다. ‘아슬아슬하게 이야기가 되었다’는 <바닷가의 앨범>은 돈과 집을 좋아하여 옷을 벗는 여자애의 이야기다. 남자애도 온다. 그들이 섹스를 한다. 그리고 탁구를 치며 사소한 이야기를 한다. 혹은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 그건 진짜일까. 아니 이 이야기 자체는 진짜일까?
<편리한 드라이브>에서 남자는 아무 것도 없는 마을을 차로 달리다가 편의점에 들어간다. 화장실에 가려다가 자위를 하는 여자를 만난다. 그녀를 데리고 나와 섹스를 한다. 이건, 별 거 아닌 남자에게 반해 섹스를 하는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에서 누구와도 섹스를 하는 헤픈 여자의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이건 그 남자의 망상이다. 아무 것도 없는 마을에서, 아무 것도 아닌 섹스가 몽상처럼 벌어진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건 정말로 없었던 이야기. 왜냐하면 여기엔, 정말로 아무것도 없으니까.’ 존재하지 않지만 너무나 현실적인 망상. 벌어질 수 없기에 아름다운 파괴와 추락.
<전원>에서 아버지와 함께 시골로 온 소년은 여자와 섹스를 한다. 그녀가 원조교제 하는 것을 본 소년은 절망하고 분노한다. 현실은 그를 파괴한다. 섹스의 몽상만이 안전하게 그를 꿈속에 머무르게 한다. 슬프지만 조용하게. <하루하루의 거품>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는 남자는, 만화가와 섹스를 하는 일상에 대해 말한다. 나는 그녀의 인격이 싫다고. 하지만 데뷔를 못하는 남자는 계속 그녀와의 섹스에 빠져든다. 몸을 좋아하니까. 그것이 유일하게 거품이 아니라 만질 수 있는 현실이니까. 유치하고 치졸한 남자에게 섹스는 유일한 삶의 희망이 되기도 한다.
야마모토 나오키는 모리야마 토라는 필명으로 에로만화를 그릴 때에도 현실과 꿈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초현실주의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에 경계가 없었다. <해질녘의 친구들>에 실린 작품들도 그렇다. 펭귄 시인이 팬과 동거를 하는 설정이 있는가 하면, 현실과 망상을 구분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의 남자는 AV를 자원한 여성이 남편을 살해한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변하고, 그들의 여행과 섹스는 점점 자극적으로 치닫는다. 현실이 아닌 것 같은 이야기는 자극적이다.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이 눈앞에 나타나거나, 일어날 수 없는 상황들이 순간 닥쳐오는 순간 아드레날린이 치솟는다. 피하거나, 싸우거나, 잡아먹히거나 마찬가지다. 섹스는, 죽음은 최상의 쾌락이다. 그것이 결국 꿈일지라도 짜릿하고 황홀하다.
내가 본 야마모토 나오키의 첫 작품은 <학교>였다. <해질녘의 친구>의 마지막에 실린 작품이다. 학교 안의 갖가지 상황들이 병렬적으로 펼쳐진다. 노래하는 남자와 듣는 여자. 이지메당하는 아이와 항의하러 온 어머니. 양호선생에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며 상담하는 남학생, 레즈비언 동급생 등등이 학교 안 여기저기에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컷과 컷을 넘나들며 서로에게 스며든다. 학교는 부조리하고, 그들의 이야기는 연결되지 않고 흩어진다. 컷백 기법을 현란하게 사용하는 야마모토 나오키의 <학교>는 일단 시작하면 마지막 순간까지 영문을 모르면서도 질주할 수밖에 없다. 인생의 한 순간이 그렇듯. 소년은 학교 밖을 나오며 말한다. 고이면 썩어버려.
물은 그렇다. 고인 물은 썩지만, 흐르는 물은 어디론가 향한다. 멈추지 않고, 정형화되지도 않고 끊임없이 알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간다. <내일 다시 전화할게>도, <해질녘의 친구들>도 물의 이미지와 느낌이 잔뜩 배어 있다. 야마모토가 말하는, 물에 잠긴 몸은 입체적이어서 그리기 좋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섹스는 물이고, 인간은 물이다. 인간의 조상은 물에서 왔고, 자궁 안의 양수 속에서 성장한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마음도, 감정도 결국은 물이다. 존재하지만 흩어지고,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포용한다. 물의 느낌처럼 야마모토 나오키의 작품은 스며든다. 너무나 격렬하고, 변태적인데도 결국은 마음을, 몸을 적신다. 섹스는, 인간은 결국 물이다.
김봉석(문학평론가) 2018년 8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