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던 20대를 보내고 30대를 허둥거리고 있는 지금도 세상은 나에게 망망대해 같긴 마찬가지이지만, 다행히도 만화는 그 대해에서 날 살린 쪽배 같은 것이 되어 주었다.
여전히 두렵고 하나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배를 붙들고 있는 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숨을 돌리고 바라보니 이젠 왠지 크고 안전한 배에 타고 있는 이들이 별로 부럽지도 않다.
어쨌든 나는 나의 배를 타고 있으니까.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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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란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젊은이
뉴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의 마지막 밤, 불러 주는 이도 부를 이도 없는 나는 방에 홀로 남아 컴퓨터 게임을 하며 2000년을 맞이한다. 가족들에게 잘살고 있다고 큰소리 치고 있기는 하지만 만화가가 되기 위해 고향인 삼천포를 떠나 서울에서 친구의 자취방에 얹혀 살고 있는 백수 신세일 뿐이다. 변화하는 세상보다 더 빨리 돌아가는 게임업계에 종사하는 주변 친구들의 삶과 비교하면 나의 느슨한 일상은 ‘그냥 놀고 있다’는 핀잔을 들어도 대꾸할 말이 없다. 그렇게 느긋하게 지내던 어느 날, 고향의 형에게서 걸려 온 전화 한 통.
‘아버지, 암이다!’
뱃사람으로 젊은 날을 보내며 가족에게 폭력적이었던, 이제는 꼬장꼬장한 노인이 되어 버린 아버지가 죽는다?… 마치 연극 대사처럼 실감나지 않는 말 한 마디에 어쨌든 나는 서둘러 고향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오른다. 오랜 만에 들른 고향은 시큼한 옛 추억들의 냄새들이 희미하게 배어 있을 뿐, 여전히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은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상태가 심각해지고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아버지를 입원시키면서 자연스레 간병은 내 몫이 된다. 아버지의 병상을 지키면서도 여전히 나는 무언가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죽음이 가까워 오는데도 나는, 또 삶은 어쩜 이렇게 평온하기만 한 것일까…
불안한 청춘의 초상
이정수 작가의 데뷔작인 <바다 앞에서>는 희망의 기대로 들뜬 2000년대 초반, 무기력하게 도시 생활을 이어가던 작가의 경험을 아버지의 죽음을 중심으로 구성해 내고 있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 고향에도 도시에도 어디에도 몸 둘 곳 마음 둘 곳 없는 불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빨리 움직이는 주변의 상황들과 자신의 대책 없는 미래에 대한 한심함, 절친의 연인과 몰래 하는 사랑…
<바다 앞에서>는 기대와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던 뉴밀레니엄의 환상에 대한 실재의 답변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 불안한 청춘의 삶에 대한 담백한 보고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