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후기

보리스 그로이스
19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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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이자 예술비평가 보리스 그로이스의 ‘소비에트 공산주의’에 대한 도발적인 해석을 담은 『코뮤니스트 후기』가 출간되었다. 그로이스는 중요성과 명성에 비해 그간 한국에서 소개가 미미했다고 할 수 있다. 1995년 “아방가르드와 현대성”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첫 저서 『스탈린의 종합예술』 이후로는, 그의 논문이 포함된 몇 권의 책들이 소개되었을 뿐 그로이스 철학의 전모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는 드물었다. 한국에서 그는 오히려 동시대 예술 현장에서 활발하게 작업하는 전문 큐레이터로 더 알려졌는데, 때문에 그가 이번 책에서 ‘공산주의’를 본격적인 고찰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다소 의외로 여겨질 수도 있다. 사실 정치와 미학의 교차 문제를 집요하게 탐색해온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전문가로 그로이스를 알아온 사람에게조차 이 책은 놀라움을 안긴다. 마르크스가 월스트리트에서 사랑받는 반면정작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혁명을 기념조차 하지 않게 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코뮤니스트 후기’이라니 그는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그로이스는 철학과 언어가 지배했던 스탈린주의적 사회야말로 공산주의적 세계였다고 단언하며, 결코 사면될 수 없는 사악한 음모적 정치가로 여겨져온 스탈린을 진정한 공산주의 철학자로 구원해낸다. 그 누구도 쉽게 동의하기 힘들 주장을 펼치며 우리의 상식과 합의를 깨뜨리는 그로이스의 기상천외한 이 책은, 오늘날 거의 불가능해진 것으로 보이는 유토피아로서의 공산주의를 사고하는 데 중요한 지침을 마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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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서문 제1장 사회의 언어화 제2장 역설이 지배할 때 제3장 밖에서 본 공산주의 제4장 철학의 왕국: 메타노이아의 관리 옮긴이의 글 추천의 글_서동진

Description

보리스 그로이스의 지적 도발 “공산주의 혁명은 돈의 매개로부터 언어의 매개로 사회를 번역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실천의 차원에서 행해진 언어로의 전회다.”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재발명 : 언어만으로 작동하는 철인들의 왕국 이 책이 다루는 중심 대상은 소비에트다.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나 그것의 결정적 국면으로서의 ‘러시아 혁명’이 아니라, 스탈린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다룬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로이스에 따르면, 공산주의 이념을 살려내기 위해 스탈린을 거부하는 일, 진짜 사회주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면서 이전의 모든 시도들이 진정한 공산주의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는 소비에트에서 언어에 걸려 있는 특별한 하중에 집중하는데, “공산주의 혁명은 돈의 매개로부터 언어의 매개로 사회를 번역하는 것이다”라는 단언이 보여주듯이, 그로이스가 그려내는 소비에트는 결국 ‘언어의 왕국’이다. 경제는 돈을 매개로 기능하고 정치는 언어를 매개로 기능한다. 공산주의 기획이란 정치가 자유롭고 자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돈을 매개로 한 경제를 언어를 매개로 한 정치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소비에트에서 언어가 지니는 절대적인 위상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선다. 언어를 통해 권력을 비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권력의 정당성 자체가 언어를 매개로 구축되어 있다. 다시 말해 소비에트 사회는 “권력과 권력을 향한 비판이 동일한 매개를 통해 작동하는 사회”였다. 공산주의 지도부는 자신들이 만일 언어에 대한 통제권을 잃게 된다면 모든 걸 잃게 되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반면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자본주의 자체는 다른 매개를 통해 작동한다. 따라서 비판이 의미 있으려면 우선 사회가 바뀌어야만, 즉 언어화되어야만 한다. 그로이스는 “비판적 의식의 소유자들이 어째서 본능적으로 공산주의에 이끌렸는지가 이로써 설명된다”고 말한다. ‘언어철학자’ 스탈린: 사회의 총체적인 언어화 그로이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언어철학자’로서 스탈린의 지위를 격상시킨다. 그는 1950년대에 스탈린이 언어학 논쟁에 개입했던 ‘사건’을 소개하는데, 스탈린은 논설을 통해 ‘언어는 상부구조의 일종이며 그 본질은 계급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마르주의의 언어관을 전면 부정하면서, 언어는 모든 구성원들의 공통의 의사소통 수단이라고 선언한다. 그로이스가 보기에 이러한 스탈린의 언어관은 ‘사회의 총체적인 언어화’라는 소비에트식 존재론에 부합하는 것이다. 또한 스탈린은 기이하게도 ‘언어가 토대도 아니고 상부구조도 아니면서, 동시에 토대와 상부구조가 아닌 어떤 것도 아니’라고 모순적인 태도로 언어를 규정하는데, 이렇듯 서로 모순되는 명제들의 동시적인 타당성을 인정하는 논리는 총체성totality의 논리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소비에트라는 언어 왕국은 모순과 역설, 무엇보다 총체성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으로,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운 형식논리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와 구별된다. 그로이스가 말하는 역설과 총체성의 논리는 이른바 ‘보편주의’의 문제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파시즘 담론이 특정 인종이나 국가가 다른 인종이나 국가보다 우위에 있다는 주장을 공공연하게 펼쳤다는 면에서 ‘충분히 전체(주의)적’이지 못한 반면에, 공산주의 담론은 ‘전체whole를 자신의 대상으로 채택’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위한 또 다른 가설 후반부에서 그로이스는 이 책을 통틀어 가장 파격적일 주장을 펼친다.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는 공산당 지도부가 스스로의 자유 의지에 따라 공산주의를 철폐한 결과라고 봐야 하며, 이 결정이 공산주의의 실현을 완전하고 최종적인 것으로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이 기막힌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그로이스로 하여금 소비에트의 종결이라는 사건을 새롭게 ‘발견’하도록 이끈 것이 어떻게 해도 종결될 것 같지 않은 자본주의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 책 곳곳에서 비판하고 있듯이, 그로이스는 전체를 바꾸지는 않고 무한한 점근선을 그리는 타협적인 대화를 통해 다른 세계로 나아가려는 서구 좌파에 대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자는 될 수 있어도 혁명적 주체는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개종이나 전향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을 ‘메타노이아metanoia’라는 개념을 통해 중단과 종결이라는 결단을 요청한다. “이전과 똑같이 하기를 그만두는 것, 지나간 길을 따르기를 그만두는 것, 악무한의 쳇바퀴 굴리기를 그만두는 것.” 이것이야말로 혁명적 주체의 고유한 자질이다. 그로이스, 사고금지를 위반하는 지식인 이 책의 원제는 “Das kommunistische Postskriptum(영문판은 Communist Postscript)”으로, 제목에서 170년 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표한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선언이라는 말에 깃든 ‘시작’의 의지는 후기後記라는 말에 담긴 ‘종결’의 뉘앙스와 대구를 이룬다. 하지만 만일 이 책이 마르크스에 의해 시작된 공산주의의 최종적 종결에 ‘덧붙이는 말’이라면, 그 후기의 의도는 분명 이중적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역사적으로 유일했으며 분명 완결되어버린 현상인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또다시 반복될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개시하는, 그런 완결”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이스가 보기에 언어의 권력, 즉 철학의 왕국을 확립하려는 새로운 시도는 충분히 있을 법한 것이고, 나아가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다. 그로이스는 이 책에서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기상천외한 주장들을 펼치는데, 이는 인생의 절반씩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았던 그의 독특한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찌 보면 터무니없게 들리는 주장들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한 ‘지금 여기’의 자본주의적 현실 감각의 바탕 위에서 구축해낸다. 이 작고 놀라운 책이 건네는 말이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여전히 꿈꾸는 사람들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로이스의 무시무시한 사고실험을 지지하는가의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는 기꺼이 한 가지는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오늘날 만연한 사고금지Denkverbot를 위반하는 지식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를 향한 노스탤지어 혹은 기대 어디에나 스며 있는 스탈린주의 없는 공산주의를 조롱한다. 절대적 악에 가까운 것으로 치부된 스탈린주의를 구원하려는 그의 악마적인 시도를 손쉽게 품평해서는 곤란하다.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사고를 감행함으로써 그는 유토피아로서의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는 수고를 마다 않는다.”_서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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